살아가다 보면, '내가 내 삶을 정말 좋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좋아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삶을 좋아한다, 라는 말은 자주 쓰는 말이 아니고 어딘지 어색하게도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핵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진실은 언제나 드물게 마주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내가 내 삶을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다른 질문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나 가졌는가, 내가 남들보다 얼마나 잘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건 모두 '핵심적'이지 않다.
오히려 핵심은 내가 원하는 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가, 내가 남들보다 잘산다고 할 때의 그 기준은 내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인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헤아릴 때 그것들은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인가, 내가 행복을 가늠할 때 그 행복은 진짜 내가 원하는 행복인가, 라는 질문이 핵심에 가깝다. 그 질문들을 하나로 모으면, '나는 내 삶을 정말 좋아하고 있는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살다 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어느덧 원하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 그저 남들이 다 중요하다고 하니 나도 좇고 있고, 남들로부터 느끼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이 무서워서 남들을 따라 살고 있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도, 그저 남들이 원하는 직장, 동네, 상품 같은 것들을 나도 좇아 살고 있다. 그럴 때, 나는 그런 것들을 좇느라 정신없이 견뎌내고 있는 이 나의 삶을 정말 좋아하는가, 라고 물어볼 수 있다.
내가 이 삶을 좋아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이다. 여유로운 주말 아침에 나서는 가족과의 산책, 회사 점심 시간에 동료들과 나누는 수다, 늦은 밤 홀로 책 읽는 시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에 바로 그런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삶을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좇는 것들, 강박을 느끼는 것들, 집착하는 것들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서 강요당하는 것들, 특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의식적으로 강요받는 것들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라는 것들이 어느덧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조종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부분들이 너무 커져서 삶을 뒤덮어버릴 정도가 된다면, 나는 내 삶을 좋아하지 않아, 라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하나의 삶을 부여받은 한 명의 인간에게 의무가 있다면, 자기 삶을 좋아할 의무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 삶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느낀다. 삶이 너무 메말라 있다고 느낀다면, 당장 오늘부터 서점에 달려가 좋아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고른다. 음악이 부족하지 않나 싶으면, 음악을 챙겨 듣는다. 데이트가 부족한 것 같으면, 양손에 아내와 아이의 손을 하나씩 잡고 달려나간다.
그리고 내 삶을 싫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 요소에 대한 '제거'를 다짐한다. 때로 그 요소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삶을 좋아하기 위해, 그런 것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꿈꾸는 것이다. 내게는 내 삶을 좋아할 의무가 있으므로, 내 삶을 싫어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제거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삶을 개척할 용기를 지닌다는 건, 그런 의무로부터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아내와 아이랑 함께 바다 앞에 고요히 앉아 있을 때, 삶을 좋아한다고 느낀다. 그럴 때, 내게 무엇이 없어야 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확신한다. 그 확신이 삶의 추동력이다. 이 삶을 사랑하기 위한, 절실한 이유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죽는 날까지, 이 삶을 더 온전히 좋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