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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Nov 08. 2022

아이가 부모를 살리는 방식

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공원으로 나서는데, 이 동네의 고요함과 한적함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해야할 일들의 압박감, 책임감, 스트레스와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어떤 죄책감과 중압감으로 뒤죽박죽 되어 있던 마음이 녹아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하늘 아래를 거닐고, 단풍의 얼룩 같은 작은 것들에 집중하면, 늘 치유된다는 걸 느낀다. 

아이가 나를 치유시키는 방식은 신기하다. 가령, 아이는 도로에 있는 하얀색 페인트는 밟으면 안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 이유는 하얀색 선이나 글자 같은 것들은 다 상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이와의 그 하얀색 밟기에 신경쓰느라, 다른 것들을 잊어버린다. "이히히! 나는 이제 상어한테 잡아먹혀서 아빠 유령이 되었다." 그러면 아이는, "수리수리 마수리, 다시 아빠가 되라, 얍!" 하고 외치고, 나는 "어?! 아빠가 방금 유령이 됐었어." 하고, 아이는 "상어를 밟아서 그래."라고 한다. 길을 걸으며 이걸 열 번쯤 반복한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은행잎으로 가득 메워진 길바닥이 보이고, 그 위의 푸른 하늘이 보이고, 반짝거리는 연못 같은 게 보인다. 그러면, 나는 이 작은 놀이 같은 것에 집중하느라, 쉴 새 없이 내게 놀이를 제안하고, 장난을 치고, 무언가에 호기심을 갖는 아이를 좇느라, 내가 금방 치료되어 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머릿속은 어느덧 깨끗해져 있고, 내 앞에는 아이와 보낼 하루가 투명하게 주어져 있다. 

아이랑 둘이 마트에 가서, 작은 장갑을 하나 사주고, 천원짜리 지네 장난감을 사주었다. 돈까스와 우동을 시켜먹고, 나는 겨울에 입을 셔츠 하나를 골랐다. 우리는 둘다 마트를 좋아한다. 아이랑은 마트에서 나오면, 놀이터를 가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요즘에는 주중에 내가 돌아오면 늦은 시간이 되어버려, 아이랑은 놀이터에도, 공원에도 가지 못한다. 대신, 주말에는 실컷 놀아주기로 했다. 놀이터에서 나는 악어가 되었고, 아이를 쫓아 달렸고, 그렇게 한참을 놀았다. 

지난 주말도, 이번 주말도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동네나 인근에서 소소하게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말 하루는 아이와 둘이서 보냈지만, 하루는 아내까지 셋이서 보냈다. 가장 가까운 한강 공원에 가서, 아이는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 놀고, 우리는 한강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셋이서 모처럼 배를 탔다. 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아이와 가족을 위해서라 믿고 하나하나 좇다보면, 하루가 채워진다. 그리고 어느덧 그것은 나를 위한 시간이 되어 있다. 

작고 사소한 날들이지만, 이런 날들이 나를 살린다는 걸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둔다. 사람을 살리는 건 이런 아주 작은 것들이 전부가 되는 순간들이라는 걸 기억하고자 이 날들을 남겨둔다. 놀이터의 밧줄에 매달려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 아내랑 침대에 누워 옛날 동영상을 들여다보는 순간, 늦은 밤 혼자 책이나 만화를 보다 글을 쓰는 시간, 날씨가 좋은 날의 하늘이나 나뭇잎의 색깔, 하루를 가득 채우는 아이와의 시시껄렁한 장난, 아내와 주고받는 별거아닌 농담이나 어리광, 결국 그런 것들 때문에 살게 된다는 걸 매번, 다시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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