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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Dec 29. 2022

육아의 의미

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


한 존재의 유년기를 곁에서 보낸다는 건, 너무도 이상하고 특별한 일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종종 든다. 어차피 아이는 이 날들을 거의 기억도 하지 못할텐데, 나는 무엇하러 이리 애를 쓰고 있나. 오늘 하루 아이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왜 이리도 애를 쓰나. 그것이 무슨 인생의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왜 아이의 행복에 집착할까. 


대개 사람에게 잘해주거나, 타인을 위해 애를 쓰는 일은 타인에게 기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기억해주길 바라서 선물을 준다. 그가 나를 기억해주길 원해서 웃게 한다. 함께 하는 시간의 목표란, 대개 공동의 기억 갖기이다. 그러나 아이랑 함께 보내는 시간은, 떠나고 잊고 잃어버릴 어떤 존재를 오늘 사랑하는 일 같고, 그 일의 이상함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아이가 숨바꼭질을 하자고 하면, 나는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아이 주변에 한참을 어슬렁거린다. 그러면 아이가 숨죽여 킥킥거리며 너무 좋아하는데, 그 아이의 웃음이 내게 영원히 새겨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웃음은 아이 본인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저 나에게만 새겨져 있을 장면일 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유일무이함 때문에, 내가 아니면 그것을 기억하고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 외로움 때문에, 그 슬픔 때문에, 이 날들을 더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 아이는 매일 '싸우기 놀이'를 하자고 성화다. 그러면 나는 피곤하고 힘들어도 어떻게든 들이받는 아이를 상대해주고, 제압해서 간질거린다. 그러면 아이는 너무 좋아서 깔깔대며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이것이 다 뭔가 싶다. 내 세월, 내 시간, 내 삶은 이것을 위해 여기 있다. 나라를 구하거나, 노벨상을 받거나,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치워버린 자리에서, 그냥 사랑하며 소모하고 떠내보내기로 택한 것이 내 삶이다. 


이것은 유전자가 내게 하는 일이겠지만, 유전자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삶의 진실 같은 것을 깨닫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나는 너무 자주 죽음과 늙음에 관해 생각한다. 사람은 너무 쉽게 죽고, 모두 죽기 마련이고, 금방 늙고, 세월도 빨리 흘러나간다. 사람은 너무 허무하게 죽고, 인생도 그저 허상 같아서 누구나 삶을 단념하고 보내야 할 때가 온다. 아이를 대하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그런 진실이 참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나의 어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나는 어느덧 부모가 되어 있고, 부모님은 나의 어릴 적과는 너무 먼 곳에서, 너무 달라져 있다. 


삶이 쏜살같이 흐르는 중이고, 아이가 산타를 모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지금 내게 쌓여 있는 온갖 고민들도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금방 올 것이다. 가끔은 내가 인생의 모든 시간을 한 순간에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상하게도, 한 아이의 유년기가 곁에 있다는 것에서 슬픈 축복, 외로운 감사함 같은 걸 느낀다. 나는 여기에서 바람 같은 삶을 잠시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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