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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Feb 03. 2023

'더 퍼스트 슬램덩크' 후기 : 치유서사의 힘

영화 포스터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슬램덩크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슬램덩크가 단순히 성공서사가 아니라 치유서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어서 아닌가 싶다. 언뜻 보면, 우승, 승리, 성공을 목표로 하는 전형적인 성공서사 같지만, 인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이것은 성공 보다는 개개인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정대만이 울면서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농구로부터 떠나 폭력배가 되었지만, 사실은 농구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왔다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어릴 때는, 그 장면이 그냥 좋았지, 왜 좋은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 다들 강한 척 하지만 알고 보면 순수한 소년이나 소녀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 라는 것을 어릴 적에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애써 아닌 척하고, 모르는 척 하고, 강한 척 하지만, 사실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한번쯤은 그 갑옷이 벗겨지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강백호가 채소연으로부터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량배에 불과했던 강백호는, 그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리거나 녹아 내리는 듯한 무언가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여느 소년 만화에서처럼 농구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때문에 농구를 택했을 것이다. 


이번 극장판은 송태섭의 치유서사를 다루어서 좋았다. 아버지의 죽음, 형의 죽음, 어머니의 절망 가운데에서 자기가 의지할 것이라곤 오직 농구 밖에 없는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다. 어린 소년은 농구가 없었다면, 아마 그 시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약이나 술담배에 빠져 인생을 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태섭은 농구에 절실하리만치 몰두하며 그 시간을 이겨낸다. 그 절실한 몰입, 이라는 것이야말로, 사실 인생이고, 또 치유의 전부나 다름 없다. 


대개 이런 치유서사는 주로 로맨스물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상처 입은 주인공들이 연인에게 의존하며 사랑받고 세상을 이겨내는 스토리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슬램덩크는 그 '연인'의 자리에 '농구'를 놓았다. 농구와 연애한, 농구로 삶을 치유받은, 농구로 한 시절을 견뎌내고, 삶의 의미를 얻고, 나쁜 길로 빠질 수 있었던 소년들의 이야기다. 누구나 그렇게 절실한 의존이 필요한 시절을 보낸다. 


더군다나 이들을 치유하는 건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이다. 모두 어떤 상처나 억압을 짊어지고 있는 약간 무뚝뚝한 소년들이지만, 이들은 한 팀을 이루어 서로를 지탱하며 보이지 않는 손을 붙잡아준다. 상처 입은 꿀벌들처럼 모여 팀을 이루고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해주면서,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치유해가는 여정을 그려낸다. 그들에게는 농구가 너무도 필요했는데, 꼭 1등이 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이 그들을 삶에 붙잡아주는 유일한 끈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는 기억나는 장면이 정말 많지만, 패배 후 낚시하는 윤대협과 가업인 식당을 물려받은 변덕규에 대한 인상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건 최고가 되기 위해 목숨 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마다 한 시절, 청춘에 스쳐 지나간 농구, 혹은 연인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그 시절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여 매일 동아리방을 찾아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밤마다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을지도 모른다. 슬램덩크의 소년들은 농구가 전부인 한 시절을 살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치유했고, 삶이 되어 주었고, 그들을 온전히 살게 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몰입할 것, 삶의 의미를 주는 것,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에서의 역할이랄 게 필요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농구부가 없었다면, 그들은 어떤 청소년기를 보내고, 어떤 청년이 되었을까. 모르면 몰라도, 더 외롭고, 절망적이고, 상처를 이겨낼 수 없는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구를 좋아했고, 함께 하기를 원했고, 자기가 의미있는 존재이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랬기에 '영광의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다음 삶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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