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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Feb 01. 2021

아이의 마음으로 다시 사는 일


아이와 밀착하여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이따금 시간을 건너뛴 채로 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십여년 정도를 통째로 건너뛴 채, 아이의 마음을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장난감에 눈이 동그래지고 놀라는 아이의 마음, 비둘기를 쫓으며 깔깔대는 마음, 할머니나 고모를 보고 그저 순순하게 반가워하는 마음을 보고 있으면, 나도 잠시 어릴 적의 어느 시절로 돌아간 것 같고, 그 사이의 시간은 모두 사라진 것 같다. 


다소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사람을 만나는 걸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이다. 그저 할머니나 할아버지처럼 그 누군가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어찌 그렇게 좋아하는지 신기하다. 보통 나이가 들어 즐겁고 행복하려면, 무언가 다른 계기가 있어야 한다. 같이 맛있는 술을 마시든지, 좋은 콘서트에 가든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사업을 함께 진행하든지, 어떤 이유들 속에서 반가움도, 기쁨도 더 피어나기 마련이지만, 아이는 그저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를 너무 사랑하고 기뻐한다. 그 마음 앞에서 무언가를 잃었거나 배워야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이랑 신나게 얼마간 놀아주고 나면, 아이는 혼자서 무어라 중얼중얼대며 혼자 놀기도 참 잘한다. 내가 샤워를 할 때는 욕조에 넣어두면, 혼자 무엇을 하는지 열심히 몰입해서 물과 열심히 대화를 하고 놀고 있다. 마찬가지로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서도 역할놀이를 하면서 잘 놀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마치 어릴 때 내 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나도 레고나 장난감을 갖고, 그림을 그리면서 놀던 그 시절 속에 나도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이는 늘 곁에 누군가가 있을 때, 또 충분히 함께 놀고 난 다음에는, 무언가 안심한 듯이 그렇게 혼자 노는 일에 몰두한다. 누군가의 사랑이 주는 여운이나 사랑의 보호 안에서 혼자만의 세계를 안심하며 누리는 것 같다. 


나도 어릴 적, 내 방에서 혼자 노는 걸 좋아했는데, 그럴 때도 늘 완전히 혼자라는 느낌 보다는, 방 밖에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있고, 그렇게 집안 전체에 같이 있다는 느낌, 그렇게 보호받고 함께 있다는 느낌 안에서 혼자 노는 것이 좋았고 가능했던 것 같다.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고, 홀로 놀지만 홀로가 아니고, 사실은 함께 있고, 사랑 속에서 보호받는 가운데에서도 나 자신일 수 있는, 홀로일 수 있는 어떤 가능성 속으로 나아갔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면, '혼자'라는 것조차 사실은 얼마나 이중적인 것인지 느끼기도 한다. 지난 몇달간 철저히 혼자 살았을 때 느꼈던 차가움과 이 어릴 적 자신을 샇아가는 '홀로'란 얼마나 다른 것인지도 알 것 같다. 사람은 결국 타인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타인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얼마 전, 아내랑 이야기하면서 나는 아이를 하나 더 가져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어차피 나 자신의 더 대단한 명예라든지, 나를 위한 더 대단한 쾌락 같은 건 그다지 엄청나게 바랄 것도 없다고 느낀다고 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앞으로 진심으로 더 행복하게 깔깔대며 웃는다고 한들, 그것이 내가 잘난 맛에 취하거나, 나를 위한 쾌락을 위해서는 아닐 것 같다고 했다. 오늘 하루 웃은 것도, 어디까지나 아이가 가장 크게 웃으며 깔깔댈 수 있게 해준 순간이었다고, 나만의 기쁨을 위한 삶 같은 건 사실 조금 시시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둘째를 갖고 살기로 했다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해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작품들이 많이 있다. 어린 시절의 마음을 잊고 사는 어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디즈니 만화들도 있고, 영화도 있다. 살아간다는 건 확실히 무언가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하는데, 아이란 아마도 내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삶에 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상의 온갖 크고 작은 사물들과 색감들을 보고 멍하니 바라보며 '이게 뭘까?'하고 물을 수 있는 마음, 모든 걸 잊고 침대 위에서 깔깔대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그저 그 사람이라는 이유로 온 마음으로 좋아하며, 사람이란 본디 사랑 속에서 자라왔다는 것 같은 일들을 다시 이해하게 해주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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