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에는 다소 이상한 데가 있어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일들이 있곤 하다. 그런 이야기를 한들, 누가 제대로 이해하겠어, 그저 알량한 동정심이나 베풀고 말겠지, 그저 일반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이해하는 척이나 하겠지, 누가 나의 '고유한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겠어, 라는 식의 생각이 거의 평생동안 이어지기도 한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하고,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고, 심리상담가를 찾아간다지만, 가끔은 그 모든 게 바보같아 보이기만 하고, 어째서인지 그런 '일반적인 방식'으로 나는 도저히 이해받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어쩌면 일종의 타인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 법한, 이런 류의 자기 안에서 생각의 뫼비우스 띠 같은 것 속에 갇히는 일이, 삶에서 몇 번쯤은 일어나는 듯하다. 왠지 남들과 다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받는 것만으로도 모욕같이 느껴지고, 참을 수 없고, 오히려 더 화가 나는 것만 같은 경험 말이다. 그러다보니, 더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솔직하게 하지 않게 되고, 더 감추고 숨기면서, 더욱 타인들을 불신하면서, 끝까지 자기 안의 상처와 기억을 품고, 이 세상을 적대시하는 일까지도 일어난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과 자아를 다루는 방식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청년 시절에는 나도 비슷한 길을 걷기도 했었는데, 내가 겪는 고뇌 같은 것들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란 어디에도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모이는 술자리에서는 물론이고, 자기 상처를 고백한다는 종교 공동체에서의 시간이라든지, 나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하는 선배 어른들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실제로 얼마나 대단하고 복잡한 경험들을 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자기 안에 깊이 빠져드는 데 습관이 되다보면,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불신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던 듯하다.
내가 진정으로 이해받는다고 믿었던 것은 아마도 연애가 거의 유일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나에 관해 무한히 이해하고자 애쓰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란, 그래서 소중한 경험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비로소 이해받을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이 열리고, 아무리 사소한 감정이나 생각도 함께 고민해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그래서 삶에서 유일무이한 순간들을 이루지 않았었나 싶다. 나의 밑바닥 근처에 있는 마음들, 욕망들, 오만들, 죄책감들, 우월감들, 열등감들, 모욕감들, 의연함들, 공격성들 같은 것을 서로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싶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은 바로 그런 순간을 서로에게 만들어주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비로소 자신의 삶도, 시간도, 마음도 온전히 내어주는 것 같다.
영성으로 가득한 어느 성직자 앞에서 눈물로 고해성사를 하거나, 학식과 감성이 뛰어나다는 현인 앞에서 모든 걸 털어놓거나, 전문적인 치료 기술을 배웠다는 사람 앞에서 펑펑 울면서 자기 마음을 내어놓거나 하는 일들이 누군가에게 있기도 하겠지만, 어느 누군가는 타인의 진심어린 사랑 혹은 상냥함 앞에서만 비로소 마음이 열리기도 한다. 이 사람은 내게 참 다정하구나, 이 사람의 상냥함이라면서 어딘지 믿을 수 있겠구나, 그러면, 이 사람이 얼마나 똑똑하거나 대단한지를 떠나서, 비로소 마음이 열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바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서로의 상냥함 앞에서 비로소 방패와 창을 내리고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며, 삶을 적대시하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
아마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욕심이나 정복과 승리가 있는 영역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평생의 상냥함들을 찾아나서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틀어막히는 마음들이, 어느 시절마다 만나는 인연들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마음과 마음이 닿고, 그리고 다음 시절로 건너가고, 자기 안에 갇혀 쌓인 타인들에 대한 불신을 털어내며, 삶의 다정함을 받아들여가게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삶이 그런 것이라면, 아마도 꽤나 살만한, 멋지고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