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으면서 눈물이 쏟아진 장면은 딱 하나였다. 사실, 책을 읽으며 눈물이 나온다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얼마만인가 싶기도 했다. 그 부분은 제제가 담임선생님에게 담담하게 자신과 세상의 진실이랄 것을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선생님의 꽃병은 늘 비어 있었는데, 어느 날 제제는 이웃집 마당에서 꽃을 훔쳐 꽃병에 꽂아둔다. 꽃 주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제제를 불러 이에 대해 주의를 준다. 선생님의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에 제제는 대답한다. "선생님,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집에는 정원이 없어요. 꽃을 사려면 돈이 들고요. 그리고 전 선생님 병만 늘 비어 있는 것이 마음 아팠어요."
제제는 그 뒤에 선생님이 매일 빵을 사라고 돈을 주려고 했지만, 자신은 그것을 받을 수 없어서 도망치곤 했다고 말한다. "간식을 가져오지 못하는 다른 애들이 있으니까요." 이 대목에서 선생님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제제는 이어서 선생님이 주신 돈으로 산 빵을 다른 더 가난한 아이와 나눠 먹었다고 말한다. "선생님께서 가끔 저 대신 그 애한테도 돈을 주셨으면 좋았는데. (...) 저도 엄마가 작은 것이라도 더 가난한 사람과 나눠야 한다고 하셔서 제 생크림 빵을 나눠 먹은 거예요." 이제 선생님의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나는 이 대목이 내게 왜 그토록 읽을 때마다 눈물을 나게 만드는지 의아했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이 어린 아이가 지키는 말과 어른들이 하는 말의 묘한 불일치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제제의 선생님은 유난히 못생겼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도 그 선생님께는 꽃을 주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자신의 선생님께 꽃을 갖다드리는데, 제제의 선생님은 꽃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제제는 선생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꽃을 갖다준 것이었다. 제제는 남들도 다 하는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른들의 엄격한 소유관계, 현실적인 이익관계에서는 '잘못'인 일이다.
마찬가지로 제제의 엄마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더 가난한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는 그 말에 따라 다른 아이들과 자신의 것을 나누었다. 그건 아이가 천사여서라기 보다는, 어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믿게 해주고 싶은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이 세상에는 명백한 불균형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는 쓸모없더라도 꽃을 한 가득 소유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아무리 간절해도 꽃 한 송이를 함부로 가질 수 없다. 누군가는 빵이 남아 돌아 버리지만, 누군가는 빵 한 조각을 나누어야 한다. 제제는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거잖아요. 그러니까 꽃들도 하느님 거예요."
아니다. 꽃들은 하느님 것이 아니고, 마당 소유자의 것이다. 빵 한 조각도 착한 이웃과 나눠 먹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이생은 몰라도 현생은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산타클로스가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갖다주는 게 아니라 그냥 돈 있는 부모가 자식에게 선물을 사주는 것이다. 부모나 교사는 그런 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가르칠 수가 없다. 그저 아이 앞에서 그 모순을 견뎌야 한다.
슬픔은 거기에서 온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좋은 삶을 사는 것, 좋은 태도를 지니는 것에 대해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지만, 그것의 공허함을 견뎌야 하는 데서 눈물이 난다. 이 아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허구이고 현실은 아이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다는 걸 숨겨야 하는 그 딜레마 때문에, 차마 말 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갈수록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어른이 되는 건, 어른의 질서에 아무런 딜레마 없이 녹아들어 현실의 파수꾼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어릴 적처럼 어른의 질서 따위 부정하며 동화만을 꿈꾸는 것도 어른이 되는 길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른이 되는 것은, 이 어린 아이 앞에서 고해성사하며 울듯이 현실을 감내하되 그 현실을 살아내고야 마는 어떤 태도를 유지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현실을 살되, 매일같이 울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배반당할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배반당한 내 안의 아이를 위해서, 어른이 되어가는 모든 아이들을 위해서 조금은 매일같이 절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절망에 짓눌리거나 잡아 먹히지 않고 살아나갈 때, 어른이라는 게 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