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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May 01. 2024

내 청춘의 작가, 폴 오스터가 작고했다.


폴 오스터가 작고했다. 그는 내가 전집을 다 읽은 몇 안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요즘에도 불현듯 '그냥' 폴 오스터가 생각날 때가 있다. <달의 궁전>에서 뉴욕의 센트럴파크에 노숙하는 청춘이라든지, <보이지 않는>에서 문학인들이 모인 자리의 한 구석에 불안하게 서있는 청년 시인이라든지, <동행>에서 강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남자라든지, 하는 게 정말 갑자기 어느 오후면 떠오른다.


그렇게, 폴 오스터가 떠오를 때면, 나도 소설을 써야지, 소설을 썼었지, 소설을 써야하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내게 알베르 카뮈, 헤르만 헤세, 도스토예프스키, 필립 로스, 장 그르니에 정도와 함께 가장 중요한 내 청춘의 작가였다. 필립 로스는 나의 아이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 폴 오스터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내가 청춘 시절 영혼을 다바쳐 사랑하던 작가들은 이 세상에 거의 아무도 남지 않았다.


요즘 들어, 폴 오스터의 소설이 계속 다시 읽고 싶었는데, <보이지 않는>과 <동행>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마침 오늘 읽기 시작한 책에서 우치다 다쓰루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사람은 죽은 뒤에도 반쯤 살아있길 바라는 것 같다고 했다. 누구나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한 동안은 기억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를 기억하면서, 그의 책 몇 권을 읽어볼까 한다.


작가가 되고 싶어서 그토록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시절, 나는 폴 오스터가 되고 싶었다. 너무나 폴 오스터가 되고 싶어서, 매일 글을 썼고, 그의 글을 필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게 영향받은 소설들을 잔뜩 썼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소설 쓰기를 관두었고, 대신 삶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삶을 기록하고, 삶을 써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작별한 청춘 시절, 나의 열망과 갈망으로 그렇게 더 짙게 남아있는 것 같다.


언젠가 폴 오스터가 자신의 책을 가만히 낭독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차분하고, 약간의 촐랑거림도 없이, 진중하고 무거워서, 나는 아마도 결코 그와 같은 작가는 될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는 하이데거를 이야기하고, 존재의 본질 깊은 곳에서 도시와 죽음과 청춘과 욕망을 이야기하며 나아갔다. 나는 거기에서 걸어나와, 삶의 표면을 걷기로 했다. 그의 그 깊었던 여정에 조의와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가 있어서 고마웠고, 그가 없었던 나의 청춘은 상상할 수 없다. 한동안, 그를 기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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