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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May 06. 2024

도서관에는 마녀가 산다

도서관에는 마녀가 산다. 마녀는 세상과 다른 법칙 속에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현실에서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 애쓰고, 경쟁에서 이기고 부와 권력에 집착할 때, 마녀는 전혀 다른 일을 한다. 마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도, 개구리를 잡아다가 냄비에 끓이고, 2000년 전에 쓰인 책을 해석하며, 우주와 자연의 원리를 탐구한다. 한 마디로, 마녀는 수수께끼를 품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치다 다쓰루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에서 하는 이야기다. 이 책은 도서관과 사서, 책에 관해 매우 신선한 관점을 보여준다. 특히, 학교 도서실이 양호실과 같은 곳이라고 하는 대목은 정말이지, 너무나 기발하면서도 정확해서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양호실을 찾아간다. 세상의 법칙을 가르치며 한 사회의 '인적 자원'을 만드는 학교라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예외적인 공간'인 양호실에 간다.


우치다 다쓰루는 학교 도서실이나 도서관이 꼭 그와 같은 공간이라 말한다. 세상에는 여백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효율'이라는 이름 안에 꽉 짜인 질서가 세계라면, 그 세계의 빈틈에 존재하는 곳이 도서관이다. 그래서 도서관은 언제나 세상 바깥에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품긴다. 우리는 그곳에 가면 세상에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지식'이 너무나 많다는 것, 죽을 때까지 결코 그 수수께끼를 모두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대면한다. 그렇기에 도서관에 들어선 사람은 겸허해지고 고요해진다.


나는 이 낯설고도 신선한 책이 너무나 좋았는데, 나의 이십대 시절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도 있다. 나는 이십대를 거의 도서관과 함께 살았다. 내가 내 자취방을 제외한다면, 가장 오래 있었던 공간이 대학교 도서관이었을 것이다. 나는 거의 제2의 집처럼 도서관에 갔다. 생각해보면, 거의 10여년 정도 나를 버티게 했던 도서관이 아니었나 싶다.


도서관 바깥에는 세상이 있었다.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은 그 세상을 따라 사라져갔다. 취업 준비를 하러 토익 학원으로 떠났고, 스펙을 쌓으려 대외활동을 하러 갔다. 다들 현실의 무언가를 쫓느라 정말 바쁘게 사라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좇고 싶은 문학과 철학의 세계랄 게 있었다. 더 읽고, 더 쓰고 싶었고, 읽고 쓰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 세계를 이어가는 데 도서관의 존재는 너무도 중요했다. 거기에는 내가 나아가야 할, 거의 무한한 미지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한, 도서관의 세계 속을 거니는 한, 나는 혼자 버려지거나 소외된 존재가 아니었다.


그밖에도 이 책은 도서관, 사서, 책, 출판 등에 관하여 이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신선한 이야기들을 많이 전해준다. 70대 할아버지라고 하는 저자가 이렇게까지 신선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그 힘은 역시 평생에 걸쳐 공부해온 인문학에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깨어 있는 이 지성이 너무 좋아서, 우치다 다쓰루 같은 친구가 곁에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즐거운 대화로 가득할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하나의 꿈이 생겼다. 나도 나의 서가와 공간을 가진 마녀가 되어, 평생 읽고 쓰다 죽는 꿈이다. 그 마녀의 공간에는, 이 세상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이 흐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서면, 이 세상과는 다른 법칙의 분위기를 느끼고, 마치 미지의 세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느낌은 세련된 핫플레이스나 사진 찍고 나면 사라지는 팝업스토어도 아니고, 적당히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모조품 같은 공간도 아닐 것이다. 그곳은 진짜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나도 바로 그런, 마녀의 오두막과 정원을 만들 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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