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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Oct 17. 2023

가장 그리울 아이의 모습

문득, 아이의 가장 그리울 모습 중 하나가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보다 작은 아이는 언제나 나를 볼 때 올려다본다. 사실, 허리춤 언저리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육아 시절 전체에서 잠깐 누릴 수 있는 한정판 눈동자이다. 더 어릴 때 아이는 부모를 올려다보기 보다는 온 세상에 관심이 더 많고, 더 크면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는 일도 줄 것이다.


특정 나이대, 아이가 고개를 들어 굳이 부모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보는 이 시기에는 묘한 의미가 있다. 눈앞에 있는 사물들을 만지고 빨고 뒤엎기 바쁘던 때도 지나고, 부모의 눈치를 보며, 부모의 욕망과 자기의 욕망을 조율하는 걸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모를 바라보는 때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약간 전략적으로 불쌍한 눈빛을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의 의사를 캐치해서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독립된 의지가 살짝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절, 아이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귀여운 데가 있다. 이제는 자기가 다 큰 줄 아는 면도 있지만, 여전히 너무 어린 아이다. 또 이전까지는 너무 어려서 부모와 좀처럼 오래 눈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면, 이제는 가만히 부모의 '눈을 읽는' 때이기도 하다. 때로는 울듯 말듯한 표정으로, 때로는 장난끼어린 표정으로, 때로는 너무 좋아 신나는 표정으로, 눈을 지긋이 마주친다. 그 눈맞춤의 소통, 이라는 게 귀하기 짝이 없다.


묘한 것이, 이런 지긋한 '눈빛 교환'으로 무언가 말하는 일이 인생에서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아내와 나만 하더라도, 눈빛으로 무언가를 지긋이 말하는 일은 별로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고, 삐지는 등의 이유로 말하고 싶지 않으면 눈 맞추기를 회피한다. 그러나 어떤 시절의 아이는 눈빛으로 가장 많을 걸 말한다. 마치 연애 초기나 썸타는 연인처럼 말이다.


요즘 아이의 '올려다보는' 눈빛을 만날 때는 주로 이럴 때이다. '아빠가 양말 신겨주면 안돼?'라든지, '오늘 킥보드 타고 나가면 안돼?'라든지, 'TV 만화 한 편만 더 보면 안돼?' 같은 식이다. 때로는 '혼내거나 안된다고 해서 억울하다.'라든지, '오늘은 엄마랑 자고 싶다.'를 눈물 글썽이는 눈빛으로 말할 때도 있다. 혹은 이빨을 어색하게 드러내며 '더 놀면 안돼? 나랑 놀아주면 안돼?' 같은 걸 눈빛으로 말하기도 한다. 한 마리 강아지 또는 고양이 같기도 하다.


아이가 크는 속도는 그 눈빛이 사라지는 속도 같기도 하다. 아이 키는 벌써 아내의 가슴팍에는 오게 되었다. 유치원에서 키도 제일 크다는데, 쑥쑥 잘 자라줘서 고맙지만 약간 세월이 야속하기도 하다. 그러나 삶이 아쉽다면 그만큼 삶을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이 아쉬움들도 소중히 간직하려 한다. 아마도 인간은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도록 만들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세상 모든 아쉬움과 그리움을 끌어안고 오늘 하루도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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