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내가 가져온 책을 보더니, 엄마는 없다면서 슬퍼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아이는 "내가 엄마를 그려줄게."하고 곧장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다. 오른팔 깁스가 아직 풀리지 않은 채로, 간신히 크레파스를 들고 엄마곰을 그리는 걸, 내가 도와주었다. 엄마곰은 아내가 좋아하는 주황색, 몸 색깔은 아이가 고른 은색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는 마지막에 왼손으로 "아, 따뜻하다."라고 적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로서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아이는 해낸다. 책 표지에 그림을 그리다니, 초등학생 시절 교과서 표지에 낙서한 이후로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책 표지는 신성한 무엇도 아니고, 거기에 아빠와 자기가 그려져 있다면, 마땅히 엄마쯤은 자기가 그려도 아무 상관 없는 것이다.
아이랑 살아가면서 묘하게 자유로워진다고 느끼는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 흔히 아이랑 살아가는 일은 그저 더 많이 시간과 비용을 쓰고, 구속되고, 제한되는 일이라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자유'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남들이 볼 때 가장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밤을 상상하고 노래하는 자유를 누릴 수도 있다. 아이를 만나면, 모종의, 내면의 자유를 얻는다.
그 자유란, 이런 것이다. 내가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르지 않더라도, 마음껏 불러주는 자장가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주는 존재가 있다. 내가 뛰어난 문학상 받을 만한 이야기꾼이 아니더라도, 제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를 제일 재밌게 들어주는 존재가 있다. 내가 TV에 나올 만큼 재미있는 코미디언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웃길 수 있는 재주가 있다. 우리는 타자의 기준에서 자유롭고, 우리의 삶을 우리의 방식으로 사랑할 권리가 있다.
아이랑 제멋대로 그려나가는 스케치북 속 이야기에, 미술대회에서 1등한 화가 선생님은 필요 없다. 우리가 즐겁게 달리는 공원에서, 나들이에서, 바닷가에서 서로의 행복을 명품으로 비교하고 서열을 나누는 기준 같은 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있어 자유롭고, 우리끼리 제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와 놀이 속에서, 마음껏 행복해도 된다. 대략 20년 넘게 땅 팔일은 없었지만, 이제는 땅 파면서 벌레 찾고 노는 자유를 누린다.
그리고 오늘, 나는 지금까지 10년 이상 20권 넘게 낸 책 중에서 처음으로 책 표지에 낙서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최고의 추억이 되었다. 우리에 관해 쓴 책에, 우리가 낙서를 하고, 그 낙서로 인해 우리 셋은 우리만의 책 표지에 이렇게 담기게 되었다. 문득, 이 책을 산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의 곰돌이를 책 표지에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가족은 둘을 더, 다섯 가족은 셋을 더, 무지개 색깔로 그렇게 그리고, 코팅해서, 그들만의 책으로 간직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