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살아온 것도 만 6년의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누워서 울고 분유만 찾던 아이를 돌보면서도, 아이의 웃음 하나, 발버둥 한 번, 눈빛 잠깐에 좋아 참으로 소중한 시절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는 게 마냥 아쉬웠고, 나중에는 아이가 다 커버려서 이 시절의 소중함들은 그저 사라진 일이 될까봐 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가 커나갈 때마다, 저마다의 시절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아이가 조금 커서 공을 쫓아 다닐 때는 같이 달려서 좋았다. 구명조끼를 입고 신나서 물 안에서 발길질 할 때는 같이 물 속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아이가 땅을 팔 때는 같이 팠고, 게를 잡을 때는 같이 잡고, 레고를 만들 때는 같이 만들었다.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부지런히 아이의 곁에 서있었고, 아이의 등을 쫓아, 아이의 삶을 함께 살며, 같이 느끼고, 웃고, 하나의 삶 속에 속해 있고자 했다.
아이는 커나가면서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렇게 부모 곁을 떠날 것 같다. 실제로 요즘 아이는 혼자서도 놀이터에 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려 논다. 이전까지는 바다만 가면, 꽤 재밌게 바위를 들추며 작은 게들을 잡았는데, 요즘에는 새끼 게를 잡는 게 약간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나는 아이랑 함께 '진짜' 바다 체험이랄 것을 해보기로 했다. 삶을 더 나은 것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게 느끼기 위해서는 매번의 성장이랄 게 필요하다. 시시해진 놀이를 다음 단계의 새로운 경험으로 올라서기 위해 야밤의 갯벌로 진짜 나서서 손바닥 만한 게와 낙지까지 잡은 것이다.
일방적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와 내 삶을 분리하고, 아이의 성장과 나의 희생을 동일시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닌 것 같다. 육아 시절이라는 게 10년이든, 20년이든, 내가 원하는 건 아이와 함께 나도 매번 새롭고 멋진 삶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아이가 있어, 나는 애써 바다로 뛰어들고, 애써 낙지를 잡으려 하고, 이제는 조금씩 더 재미난 일들과 경험들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가령, 아이랑 탁구를 치거나, 가족 밴드를 하거나, 캠핑을 하면서 내게도 새로운 경험이랄 것들을 만들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삶의 일들을 너무 엄격하게 구분하기 보다는, 가능한 한 하나의 의미 안에서 함께 경험하는 것을 희망한다. 일은 하기 싫지만 돈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되는 강제노동 보다는, 삶의 일부로서 끊임없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깊은 관심이 있다. 사람 관계는 이익을 위한 단순 인맥 관계라기 보다는, 인연 그 자체로 더 나은 삶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 육아는 나를 희생해서 빨리 지나가면 좋은 시간이 아니라, 내가 삶에서 택한 일 중 가장 소중하고 그립고도 새로운 일이길 바란다. 그런 바람으로 삶을 가득 채우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거나, 엄청나게 부자가 되거나, 대단한 명예를 얻은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나보다 잘나가는 사람이 지천에 널려 있고, 애초에 나 같은 건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경쟁에 몰두하며 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해변의 모래알만큼 많을 것이다. 나는 그들과 싸워서 별로 이기고 싶지 않다. 대신, 나는 내가 택한 삶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천재이고 싶다. 아이와 함게 성장해가며 최고로 잘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다. 인간에게 주어진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헛된 것들에 지나치게 마음 쏟으며 어리석게 사는 사람이지 않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봄바다에 늦은 밤, 아이 손을 잡고, 바다로 나선 것이다. 이 삶을 최고로 사랑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