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거의 10년만에 만난 후배가 말하길, 나의 눈빛이 이십대랑 똑같아서 하나도 안 바뀐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제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하면서, 자기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는데, 내게 육아가 어떤지 물었다. 나는 얼마 전 아이랑 갯벌에 갔던 영상을 보여주면서, 지난 아이와 함께한 몇 년은 뭐랄까, "기쁨"이었다고 말해주었다.
후배는 최근 변호사가 되어 밤낮없이 일하며 살고 있었는데, 내가 아이랑 살아가는 나날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자, 마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워요."라고 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놓고, 바다로 떠나고, 땅을 파면서, 숨차게 달리는 삶에 대해 듣더니, 그는 자기가 최근 만난 사람 중에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내가 매일 그렇게 행복하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 삶을 긍정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삶의 중심을 어디 둘 것인가, 라고 했을 때, 내가 오늘의 행복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건 분명하다. 후배는 언젠가 자기가 결혼한 사람과 함께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의 이야기를 자신들에게 다시 들려달라고 했다.
그를 만나니, 독서모임을 하면서 여러모로 삶과 청춘에 대한 낭만을 품고 살던 이십대 시절이 생각났다. 그 후배도 나와 함께 같이 모임도 하며, 여러모로 청춘의 한 때를 보낸 동생이었다. 사실, 나는 그 이후로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 때 믿던 삶에 대한 마음을 어느 정도 지켜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나의 좋은 삶을 살지, 라는 바로 그 마음을 말이다.
아마 그 시절의 나를 내 앞에 앉혀 놓는다면,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본다. 그 시절의 나는 자유롭고 아름답게, 내가 믿는 좋은 삶을 살고 있느냐고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마 너는 상상조차 하지 않겠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하루하루를 참으로 소중히 보내며 살고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의 좋은 삶을 좇는 일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싶다.
이십대의 나는 세상을 자유롭게 거닐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최고의'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 가령, 최고의 작가 같은 것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줄 것이다. 사실, 최고 같은 건 될 필요 없다고, 업계 최고의 일등을 할 필요도 없고, 정상을 향해 갈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그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되고자 하면서, 나만의 걸음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그러면서도 곁에서 내 손을 꼭 붙잡은 존재의 소중함을 잊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좋은 삶을 살 것이다. 사는 이유는, 최고의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 스무살의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왜 그렇게 늙어 버렸냐고, 마치 통나무 오두막에 사는 할아버지의 덕담을 듣는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깔깔 웃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나도 한참 즐겁게 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