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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Jul 26. 2024

현실과 이상의 격차 시대


우리 시대에 '꿈을 좇는 일'을 나쁘게 말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꿈을 좇는 일은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격차'는 사실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이상'을 좇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해소될 수 없는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항상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볼 때, 이 현실과 이상을 좁히려는 시도는 인간에게 '무한동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가령, 어릴 적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롤모델로 삼은 아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아이는 죽을 때까지 자기 안의 아버지를 무한하게 좇을 수 있다. 그 아버지라는 이미지에 도달하고자, 끝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하면서 한 평생을 갈아 바칠 수 있다. 그 동력은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무한'하다.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에는 자본주의가 이런 개인 내면의 '무한 동력'에 기생하고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SNS도 그렇다. SNS에 우리는 삶을 적당히 화려하게 편집하여 올리는데, 사실 그 삶의 이미지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SNS 속의 나는 필터나 구도를 통해 나 자신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진 얼굴로만 장식되어 있다. 옷가지나 먹다 마신 물컵이 널부러진 집안이 아니라, 잠깐만 유지되는 완벽하게 정돈된 이미지만이 전시된다. 우리는 우리가 전시한 그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를 '무한'하게 전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바로 그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무한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내가 최고로 잘나온 사진, 내가 최고로 행복한 순간, 내가 최고로 돈을 많이 쓴 시간에 대해서 올린다. 그 이유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내가 현실을 지우고 뛰어들고 싶은 유토피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미지를 잠시 만들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미지 속에서 살 수는 없다. 


참 흥미롭게도, 이런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가 한 사회 전체의 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부자가 되는 이미지, 내 인생의 경영자이자 주인이 되는 이미지, 세상의 인기와 명예를 얻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 이미지와 지금 현실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투여한다. 자본주의란, 그런 개개인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부산물처럼 존재하고 지탱된다. 그 과정에서 당신을 '이상'에 도달하게 해주겠다고 하는 수많은 상품과 브랜드, 강의 등이 만들어진다. 


사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글쓰기를 생각했다. 왜냐하면 글쓰기 또한 어떻게 보면, 그런 무한동력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글쓰기로 나를 규정하고, 내 삶을 정의하고, 나를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하더라도, 글 속에 나는 '완벽'하게 담길 수 없다. 오히려 글은 쓰면 쓸수록 나의 현실과 격차가 벌어진다. 내가 하루에 대해 쓰려고 하더라도, 하루는 다 쓰이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남는다. 이 남은 부분, 해소되지 못한 격차가 매일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생각해볼만한 점은, 인간이 이 '무한동력'을 생산해내는 '현실'과 '이상'의 격차라는 구조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능한 건 '어떤 방식'으로 그 격차를 해소하는 달리기를 이어갈까 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평생 달려야 하는데, 다만 무엇을 좇아 어떻게 달릴지만을 조정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누군가에게 그 이상은 붓다나 예수고, 누군가에게는 에르메스나 포르쉐이며, 누군가에게는 노벨문학상 작가나 자연 속 도서관 주인이고, 근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이게는 '강남 대단지 아파트 주민'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상의 포기' 같은 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이상을 다루는 방식이고, 이상과 공생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할 수 있다면 이상에 영혼을 팔지 않는 선에서, 내 삶에 이로운 이상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상은 우리를 거기에 목숨바치는 '열광적인' 상태로 만드는데, 나의 이상이 '도박의 신이 강림한 존재' 같은 게 되면 삶은 파멸이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이 구체적인 이웃들과 더불어 살며, 강박적으로 삶에 쫓겨다니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삶의 장면'이라면, 구원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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