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논리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

by 정지우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논리로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애초에 논리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인간도 완벽한 논리로 자신의 입장을 가지게 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는 기껏해야 자기를 설명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걸 더 명료하게 보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 인간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각종 입장이나 주장이 태어나는 건 논리가 아니라 그의 삶이다.

전쟁 속에서 소꿉친구나 사촌의 머리통이 날아가는 걸 옆에서 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경험을 잊을 수 없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어제까지 같이 술마시던 친구가 끌려가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역시 그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빛나는 청춘을 온통 스펙 경쟁에 몰두하도록 강요받으며 각자도생에 길들여진 사람은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다. 살아오며 겪은 경제위기, 가정에서의 차별이나 학대가 있는 사람은 그 어긋남으로부터 자기 입장을 가진다. 누구나 그런 경험에 뿌리내리며 자기 자신이 되고, 논리가 그 우주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티끌 같은 수준에 불과하다.

그래서 타인을 일개 논리 따위로 바꾸겠다는 건 일종의 오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내가 남을 바꿔야 할 만큼 옳은 존재라 믿는 것도 놀라울 정도의 거만함이다. 내 논리에 남이 맞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나의 논리라고 해봐야, 협소한 나의 삶에서 탄생한 불완전하고 남들이 볼 때는 터무니 없는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남을 바꾸려는 데 관심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나를 이해'시키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킬 수는 있다. 그러려면 최대한 겸손하고자 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편향적이고 불완전하고 결핍 덩어리에 선입관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인지 고백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호르몬의 노예이고, 동물과 다를 바 없으며, 잠과 배고픔에 취약하며 기분대로 움직이는지, 권력과 시기질투에 약하고 온갖 욕망에 쉽게 휘둘리는지 인정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며 이런 사고관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다보면, 타인으로부터 이해받는 순간이 온다. 그러고 나면, 이제 타인을 이해해야할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논리로 타인을 매도하면서 평생 살 수도 있겠지만, 그 대신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경험을 택해볼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실제로 '경험'이고 '삶'의 영역에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타인이 되어보는 것, 실제로 거울뉴런을 거쳐 타인처럼 느껴보는 것, 타인의 입장이라면 나도 그랬을 수 있겠다라고 단 한번 경험해보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삶의 영역이다. 이 삶의 영역에 발딛고 사는 게 보다 인간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내 입장에서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너무 많다면, 그 많은 사람들 입장에서 나는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생각한다. 그래서 중요한 건 논리로 정상과 이상을 가르고, 이상을 매도하거나 정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이상함을 이해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이상함을 이해하고 싶은 그 대상조차 임의로 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성인이면 몰라도 나같은 범인의 영역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내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까지의 이상함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이해받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람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