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판사시험에서 떨어졌다고 하자, 아이는 깜짝 놀라서 왜 떨어진 거냐고 물었다. 판사는 제일 힘이 세서 대통령도 감옥 보낼 수 있는 거 아니냐면서 말이다. 나는 공부를 안했다는 둥 하는 건 교육적이지 않은 대답일 것 같아서, 널 놀릴 생각을 하다가 실수로 이름에 '정방구'라고 써서 떨어졌다고 했다. 아이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그런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아주 아쉬워했다. 자신의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문제는 아이가 그 이야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닌다는 점이다. 하루는, 전날 너무 늦게까지 강의를 해서 아침에 잠이 쏟아진 날이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적당히 시리얼을 먹이고, "옷 입고 잘 갈 수 있지? 아니면 아빠 깨워."하고 잠결에 말하고 다시 잠들었다. 그런데 웬걸, 아이는 시계를 잘못 보고 그만 등교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혼자 학교를 가버렸다. 아내는 내게 아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고, 나는 할 말이 없어 "아빠 자격이 없는 저는 떠납니다..." 하고 터덜터덜 오후 강의를 다녀왔다.
아무튼, 그리하여 반에 1등으로 도착한 아이는 담임선생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나보다. 선생님이 오늘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묻자, "아빠가 잔다고 안 일어나서 실수로 일찍 왔어요." 하고 답했고, 아마도 선생님은 당황하여 "아빠가 어떤 일을 하시길래...?" 하고 물었고, 아이는 구구절절 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사실, 아빠가 판사였어야 하는데 이름을 "정방구"로 써서 떨어졌다고 말이다. 선생님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나로서는 비록 이런 일이 있긴 했지만, 아이도 한 번 스스로 챙기고 나가보느라 등교 시간도 틀려보고, 후문이 닫혀 있어 정문으로도 가보고, 담임선생님이랑 둘이 이야기 해보는 것도 다 인생 경험이고 그렇게 크는 거 아니냐고 했으나, 아내는 납득할 수 없어 하는 눈빛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동네에서 이미 여러모로 수상한 사람이 되어 있는데, 아이로 인해 더욱 수상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직장도 없이 항상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아이 등하원 같은 걸 시키고, 뭐하는 사람인지 몰라도 판사 시험이나 떨어진(과연 판사 시험 칠 자격이나 있는 인간인지, 진짜 친 건 맞는지 의심스러운), 뭐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일이 있었던 게 없었던 것보다 좋았다고 제멋대로 생각한다. 이래저래 아들과 아내한테 혼난 거 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런 일들이 있어서 인생이 더 재밌는 거니까. 내가 판사 시험에서 '정방구'라 쓰지도 않고, 늦잠 자느라 아이가 혼자 학교 간 일도 없었다면, 이 날들은 그냥 다를 것 없는 평범하고 시시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소 무해한 사건사고들이 있어서, 기억할 만한 날들이 된다. 왠지 그 날은 아이에게 미안해서, 아내랑 같이 하원을 하고 오는 길에 같이 베스킨라빈스 파인트를 먹었다. 마침 40% 할인하는 날이었다. 과연 운이 좋았다.
아이는 수영을 다녀오는 길에, 나랑 둘이서 사실 혼자 학교에 일찍 가니까 좋았다고 했다. 1등으로 교실에 도착하니 뭔가 기분이 엄청 좋았고, 선생님이랑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도 재밌었다고, 일주일에 한 번은 자기가 혼자 일찍 가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아내한테 하며, 역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꼭 나쁜 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으나, 아내는 여전히 탐탁치 않아 했다. 아이가 짠하고 불쌍하다면서, 아침을 잘 챙겨주고 자주 데려다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알고 있다. 무려 이런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하지만, 모든 일은 태어나서 처음이 있다. 그리고 그 처음은 기억된다. 죽기 전에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 때, 판사 시험 떨어진 게 기억나네, 아이가 학교 선생님한테 일러 바쳐버렸지, 껄껄껄, 하며 죽기 전 잠시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