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날보다 긴 날
하지만 이것이 과연 한 인생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하기는 무엇 때문에 한 인생이 정당화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동물들 전부가, 그리고 압도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당화의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은 단지 사니까 사는 것이다. 그뿐이다. 이것이 그들의 논리다. 그들은 아마 죽으니까 죽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으로 고민 끝이다. 나는 위스망스 전공자로서 적어도 이들보다는 조금 나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미셸 우엘벡 『복종』
생일을 다른 날보다 길게 보내고 싶다면, 비행기에 올라타서 해가 지는 방향으로 날아가면 된다. 2014년 2월, 내 서른 번째 생일이 그랬다. 난 생일 즈음을 출국일로 정해놓고 여행을 떠난 적이 많았는데, 태어난 날을 맞이해 자연스럽게 자아성찰을 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보통 그 성찰의 결과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거다. 여행을 다녀오면 새로운 나라도 된다는 듯이.
2014년의 나는 더욱이 인생이 괴로운 시절이었다. 상경과 동시에 독립하면서, 거의 일주일 만에 ‘돈이 궁해’ 부랴부랴 입사한 회사에서 5년 차를 맞이한 때였다. 회사가 재정적으로 흔들리면서 온갖 지저분한 문제들이 출몰했고, 난 그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문제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함께 오래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사표를 던지고 떠났다. 하지만 난 회사가 변할 거라고 믿으며 계란으로 바위 치기 비슷한 걸 했었고, 그 밑바탕에는 어쨌든 알량한 애사심이 있었다. 하지만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오고, 동료들도 지쳐서 떠나고, 바위는 그냥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으니, 이젠 스스로에게 결단의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나 역시 두 손 들고 회사에 사직서를 냈으나, 한 달 휴직의 여유를 줄 테니 좀 더 생각해보라는 권유가 돌아왔다.
모아 놓은 돈을 박박 긁어서 스페인으로 여행지를 정했다. 마드리드가 종착지인 KLM항공은 중간에 암스테르담을 경유했다. 인천에서 출발한 시간은 무려 2월 2일 00시 55분. 그리고 그때부터 쓸데없이 길고, 그래서 더 괴로운 서른 살의 생일이 시작되었다. 내 플레이리스트의 뮤지션은 ‘망각화’. 내 본능이 알았던 거다, 잊고 싶은 생일이 될 거라는 걸. (물론 실제로는 ‘희망을 새기는 꽃’이라는 뜻이다. 잊는다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비즈니스석이나 퍼스트석에 앉으면 열두 시간의 비행이 하나도 힘들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꼼짝없이 갇혀 있다는 건 똑같으니까. 하지만 살집 두둑한 아저씨가 양 옆에 앉은 탓에 팔걸이마저도 모두 빼앗길 경우는 없겠지. 안 그래도 좁은 자리가 더 좁게 느껴졌고, 거기에 아저씨들의 들숨날숨으로 공기마저도 후끈하게 벽을 치는 느낌. 그리고 왜 내 다리는 이렇게 긴 것인가. 이렇게 길 거면 무릎이 한 쌍씩 더 있어서 두 번은 접을 수 있게 해 줘야지.
열두 시간 비행했는데도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5시 무렵. 환승을 위해 잠시 대기하다가, 두 시간 반 더 비행하고서야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다행히 마드리드행 비행기는 좌석이 조금 더 넓었고 빈자리도 많았다. 먼동이 터오면서 오렌지 빛으로 물든 지평선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데, 그 가운데 홀로 반짝이는 점 하나. 너무 홀로 있어서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 같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괜히 저 인공위성과 나를 동일시해 보았다. 너는 별이 아니고 나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지만, 고독하고, 고고하고, 아름답다고.
그렇게 고독하게 길을 잃었다. 마드리드의 Alonso Martinez 역에서 나온 순간부터. 난 지도를 잘 볼 줄 알지만, 그건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알고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동쪽을 향하는지 북쪽을 향하는지 알 때에 그렇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지도를 들이밀면서 여기가 무슨 거리냐고 물어봐도 아무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으니 길을 잃을 수밖에. 감을 믿고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힘차게 전진해보지만, 보통 그럴 때에 감은 시원하게 뒤통수를 치기 마련이다. 나름 오랫동안 스페인어를 배웠는데, 왜 현지에서는 무용지물인지.
열두 시간과 두 시간 반의 비행, 그리고 숙소 찾아 삼만 리 퀘스트까지 모두 끝내고, 바람 불고 쌀쌀한 솔 광장의 말 탄 아저씨(까를로스 3세) 동상을 바라보며 분수대에 앞에 서서 이제 뭐할지 가늠하고 있을 때 내 손목시계는 11시였다. 아침 11시.
첫날이니까 일단 무작정 걸으며 이 곳 분위기를 탐색 하자 싶었다. 그래서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처럼 하염없이 걸었다. 솔 광장에서 마요르 광장으로, 마요르 광장에서 그란 비아로, 그란 비아에서 스페인 광장으로, 그리고 왕궁과 대성당으로, 그리고 메트로 타고 Opera역에서 Banco de España역으로 이동해서 티센 보르네미스사 미술관 관람. 이렇게 감흥 없이 샤갈, 피카소, 달리, 미로, 몬드리안, 칸딘스키, 피에르 보나르, 로트레크, 호퍼, 에곤 실레를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걸린 살구색 방이 하나 둘 셋넷 자꾸만 이어지는데, 이미 난 고독이니 고고니 아름다움이니를 받아들일 마음가짐을 죄다 마드리드 길바닥에 질질 흘리고 온 상태였다. 세벨레스 광장에서 멍 때리다가 숙소까지 걸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왔는데, 여전히 초저녁 시간. 생일이고 뭐고 하루가 너무 길었다. 지치고 피곤해서, 일단 잤다. 새로 태어나고 뭐고, 일단 새 하루를 맞이하고 싶어서.
그 날 내가 한 것은 결국 '이동'.
'이동'만 했다.
생일이랍시고 비행기 타고 시간이 가는 걸 유예시키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생일은 긴 것보다 짧은 게 낫지 않을까. 희소성면에서. 아까우니까 시간을 조금씩 꺼내서 소중히 아껴 쓰겠지. '이동'보다는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말이다. 다음번에는 비행기를 타고 해가 뜨는 방향으로 날아가 볼까. 그것도 '이동'으로 귀결되나.(어쩌면 더 어리석은?) 그럼 그냥 생일엔 가만히 있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