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딴 곳에서

3. 2014년 2월

우천 시 주의사항

by 지예강

비가 온다. 오늘은 나가지 말자. 사색하는 날로 삼아 버리면 되지.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


여행 중에 비를 자주 만났다. 떠나는 날, 돌아오는 날, 머무는 날 상관없이. 김연수 작가님은 『언젠가, 아마도』에서 그렇게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일본에서는 남자는 ‘아메오토코’, 여자는 ‘아메온나’라고 부른다고 하더라. 난 여자니까 ‘아메온나’인가. 아주 유명한 요괴 이름이라는데. 어쨌든 김연수 작가님 말로는 이 단어를 아는 순간, 여행과 비를 묶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 물론 난 이 단어를 알기 전부터 여행과 비를 묶어서 생각했었는데, 단어는 몰랐지만 ‘닌 이상하게 어데 갈 때마다 비가 오노?’라는 어머니의 핀잔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여행 중에 만나는 비가 누군가에겐 낭만적일 순 있겠지만, 나에게는 거의 백 퍼센트 그 날의 고생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그래서, 폭우 속 론다의 기억.


우산이 소용없는 비바람. 경이롭다는 누에보다리보다 더 경이로운 날씨. 경치고 풍광이고 즐길 새도 없이 식당으로 피신.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두 분이 사이좋게 운영하는 그곳에서 다른 나이 지긋한 손님들 사이에 앉아 따뜻한 음식으로 몸을 녹였다. 삶은 계란, 가지, 피망, 양파, 감자를 푹 익힌 뒤 으깬 토마토와 기름으로 볶아낸 이름 모를 요리를 먹고, 맥주도 한 잔 하고, 커피까지 주문해서 천천히 다 마셨다. 마음 같아선 거기 영원히 있고 싶었지만, 괜히 불운한 이방인을 좀 더 신경 쓰는 듯한 어르신들의 호의를 충분히 느끼고도 남을 만큼 미적거렸기에 다시 폭우 속으로 나왔다.



세비야로 돌아가는 터미널로 가는 길에 이미 푹 젖은 생쥐 꼴. 버스 출발 시간은 두 시간이나 남아 있고, 난 벌벌 떨면서 터미널 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 새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져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이 어지러웠다.


론다에서 세비야로 가는 버스는 6시에 한 대, 7시에 한 대. 터미널의 와글와글한 사람들은 모두 그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정좌석이 아니라서 좀 불안했다. 6시 버스를 못 타면 7시 버스를 타야 했는데,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니었으니, 6시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승차하려는 사람들이 버스를 에워싸며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난 앞줄을 선점하는 쾌거를 보였는데, 기사 아저씨는 학생증이나 증명서 같은 걸 보여주는 사람들을 먼저 태우기 시작했다. 아마 그 지역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인 모양인데, 그 학생들만 해도 버스 한 대를 채울 인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난 가까스로 승차에 성공했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일본인 남자 두 명은 7시 버스를 타야 했지만. 버스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기와 냄새로 어질어질한 상태를 한참 견디다 보니 세비야에 도착. 세비야도 폭우가 쏟아지는 중이었고, 뒤집히는 우산을 몇 번이나 고쳐 쓰면서 숙소로 향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길에서 부딪힐 뻔했던 남자는 나에게 스페인어로 험한 말을 막 쏟아냈는데, 맞받아 칠 힘도 없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이 빗속에 나다닌 내가 잘못이다. 그런데 외국인에게 그렇게 소리 지르고 악쓰진 말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꽁하게 마음에 남아서 결국엔 글로 쓰게 되잖아. (물론 외국인이든 아니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리 지르고 악 쓰면 안 됩니다.)


그로부터 꼬박 하루 반 뒤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서로에게 소리 지르고 악 쓰는 상황을 코앞에서 또 목도하게 되었는데, 내가 머무르던 6인실 도미토리에서였다. 난 짙은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쓴 젊은 여자와 은발의 아주머니, 그리고 붉은 머리 아주머니와 함께 도미토리를 나눠 쓰고 있었다. 붉은 머리 아주머니의 경우 다른 방에 머물다가 갑자기 이 방으로 옮겨 온 거였는데, 내 짐작이 맞다면 누군가의 민원으로 쫓겨 온 것 같았다. 왜냐하면 공동생활에 전혀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더럽게 썼고, 정신 사나울 정도로 분주했으며, 무엇보다 시끄러웠다. 특히 밤에 그녀의 코가 사방을 향해 내지르는 소음은, 결국 은발의 아주머니가 다른 방으로 자진해서 옮겨 가는 사태까지 만들었다.


문제는 새로 들어온 한국인 젊은 여자 두 명이었다. 대학원생인 두 사람은 모로코 여행을 끝내고 그 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숙소에 도착했다. 다들 잠든 시간이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명을 켜고, 짐을 부리고, 큰소리로 떠들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그야말로 개념 리스였다. 난 당연히 잠에서 깼고, 붉은 머리 아주머니도 일어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호스텔 쪽에서 (전적이 있는) 붉은 머리 아주머니가 소음 유발자라고 생각했는지, 조용하라는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낸 것이다. 오해를 받아 화가 난 아주머니가 한국인 젊은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시끄러우니 조용하라고. 그런데 한국인 젊은이는 호스텔이니 감수해야 된다고, 이런 게 싫으면 호텔로 가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각자의 언어(스페인어와 한국어)로 펼쳐지는 깊은 밤의 개싸움이었다. 한참 언쟁을 높이며 싸우다가 소강상태가 되자 역시 각자의 언어로 구시렁거리더니 잠잠. 그 뒤에 이어지는 붉은 머리 아주머니의 코 고는 소리. 폭우는 그럴 때 내려야 하는데. 천둥번개를 동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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