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딴 곳에서

4. 2007년 9월

토마토 농장의 기억

by 지예강

동네에서 시계를 잃어버렸는데 그걸 찾기 위해 배낭을 메고 동네가 아닌 전 세계를 떠도는 자의 눈을 생각해


김경주 「작은 소설」 『시차의 눈을 달랜다』


절망을 느끼는 상태가 아닌,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상태가 간혹 있었다. “죽고 싶어. 죽어 버릴 거야!”가 아니라 “이러다가 죽겠지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상태. 사실 난 전자는 거의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후자는 환절기 감기 걸리듯이 자주 겪었다. 독감 아닌 가벼운 감기몸살 같은 그런 기분. 화와 분노는 없지만 자포자기와 우울은 있는 상태. 물속에 푹 잠겨 숨을 완전히 쉴 수 없는 상태가 아닌, 수면에 겨우 떠 있어서 죽지 않을 정도만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상태. 그런 상태는 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길게 이어지는데, 정상궤도로 돌아가리라 예상한 날보다도 더 오랫동안 내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으로 두통과 열병을 앓고 있을 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난 경도와 위도를 가로질러 구름 속을 날고 있었다.


이십 대가 되고, 3학년까지 마무리 한 대학생활은 지겨워지고, 사랑엔 실패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녹록지 않고, … 뭐 하나 되는 게 없을 때 남들 그렇듯이 휴학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알바생으로 취업한 곳은 장애인들이 만들었다는 복조리 따위의 조악한 기념품을 방문 판매하며 돈벌이를 하는 곳이었다. 물론 난 밤마다 술집들을 전전하며 반쯤 취한 사람들의 지갑을 상대로 영업할 깜냥 따위는 없었고, 대신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 판매 알바생들이 다음 날 점심때쯤에 사무실로 물건을 가지러 오면 실적에 따라 일당을 정산해주는 일을 했다. 그렇게 먼지귀신과 곰팡이귀신이 손잡고 나올 것 같은, 담배연기와 배달음식 냄새가 절대로 빠지지 않는 그 사무실에서 몇 개월을 일했다. 그곳에서 난 더 우울해졌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죄다 프로페셔널 한 자존감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왜 난 그때 딴 친구들처럼 과외를 한다거나 호프집에서 서빙을 한다거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캐셔를 본다거나 하지 않고 제대로 돼 먹지도 못한 곳에서 일했던 것인지. “이러다가 죽겠지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라는 생각 말고는 진짜 없었나 보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번 돈을 가지고 그해 여름 호주로 떠났다. 7월과 8월 두 달 동안은 그냥 놀았다. 7월은 시드니에서 놀고, 8월은 브리즈번에서 놀았다. 그랬더니 몇 개월 동안 일하며 벌어 놓았던 돈이 똑 떨어졌는데,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아직 10개월이나 남아 있었다. 돈은 없는데 시간은 많은 경우, 그렇다면 그 시간에 돈을 벌어야지. (돈과 시간, 둘 다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매일이 일요일이던 그 때

그렇게 일자리를 찾아 도착한 곳은 보웬에 있는 토마토 농장이었다. 나처럼 (돈 벌) 시간밖에 없는 워홀러 세 명과 함께 카라반 파크에 살림을 꾸렸다. 한때는 드넓은 대륙을 누비며 용맹을 떨쳤을 테지만, 쓸모를 다 한 뒤에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바퀴가 빠진 채 공터 한가운데 멈춰 서 있는 노쇠한 카라반. 카라반 파크는 그런 카라반들 수십 대를 숙소처럼 꾸며 놓은 거대한 부지였다. 물론 실제 카라반이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구역, 텐트를 칠 수 있는 구역도 있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당연히 공용이었다. 그중 한 카라반에 넷이서 살았다.

인투더와일드

어쨌든 토마토 농장일은 ‘이러다가 죽겠지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의 기분을 ‘내가 죽기 전에 저 토마토들을 다 딸 수 있을까'로 바꿔 놓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난, 대학 때 농활조차 가본 적이 없는 진짜 도시 촌년이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만난 시골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진 토마토 밭이었으니, 문화충격을 제대로 겪은 셈이다. 밤이슬로 축축해진 공기가 채 마르기도 전 시간에 일어나 잠이 덜 깬 상태로 차 뒷좌석에 실려 20km쯤 달리면, 외국인 노동자로 분한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괜스레 데면데면해하며 안부인사나 농담 따위를 하고 있는 거대한 농장의 초입에 다다른다. 해가 뜰 때부터 그 해가 다시 질 때까지 우리들이 할 일은 토마토를 따는 일. 토마토 덩굴은 사람 키만큼 자라 마치 마나님 집 담벼락 같았는데, 노동자들은 그 이랑과 이랑 사이에 한 명씩 들어가 양 옆으로 늘어선 토마토 덩굴을 훑으며 토마토를 딴다. (어떤 라인은 650m나 된다.) 너무 익지도 너무 덜 익지도 않은, 이제 막 익기 시작한 토마토를 딸 것.(너무 익은 건 옷에 쓱 닦아서 먹어도 된다.) 딴 토마토는 바스켓에 잘 담을 것. 바스켓을 다 채우면 노동자의 아이덴티티와도 같은(혹은 목숨이나 밥줄과도 같은) 본인의 집게를 바스켓 귀퉁이에 꽂아 놓은 뒤 그 자리에 그냥 내버려 둘 것. 그리고 새 바스켓을 채워 나갈 것. 마감 시간이 되면 관리자들이 바스켓에 꽂힌 집게를 수거해, 그 집게 수만큼 일당을 책정한다. (노동자마다 집게의 색깔이나 모양이 달라서, 누가 채운 바스켓인지를 그 집게를 보고 판단한다. 다른 사람이 채운 바스켓의 집게를 자신의 것으로 바꿔 놓는 꼼수를 부리며 상도덕을 해하는 사람들은 결국 얼굴이나 배를 주먹으로 가격 당하는 개싸움으로 파국을 맞는다.)


어떤 토마토 덩굴은 덩굴 위쪽에만 토마토가 달려 있다. 이런 경우는 수월하다. 서서 딴 뒤에 바스켓에 조심스럽게 던져 넣으면 된다. 그러나 아래쪽에 달려 있는 경우는 최악이다. 체육시간에 딴짓하다가 벌 받을 때 했던 쪼그려 앉아 걷기를 여덟아홉 시간 동안 해야 한다. 호주의 9월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지만, 난 오존층이라는 방패막 없이 빛과 볕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위대한 태양의 계절로만 기억한다. 무념무상으로 토마토만 따다 보면 어느덧 머리 위에선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발밑에선 땅이 울렁울렁 대는 카오스 상태. 맛 좋고 저렴한 소고기를 양껏 구워 XXXX나 VB 맥주를 곁들여 먹는 기쁨이 고된 노동을 위로해 주었지만, 그 위로가 그나마 위로가 되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아, 쎄가 빠지게 힘들었다. 진짜 ‘이러다가 죽’을 것 같은 거다. 아직 죽으면 안 되는데, 그것도 이역만리에서 외지인으로 죽으면, 아직 나 20대 초반인데 죽으면!!!


그래서 어느 날 견디다 못해 하루 제치려고 중간에 농장에서 도망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관리자에게 딱 걸려서 바로 해고당했다. 터키인이었던 농장 관리자는 몰래 탈출을 시도한 나와 몇몇의 친구들에게 "You're fired!"라고 고함을 질렀다. 사회 또는 집단 또는 무리에서 방출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창피하고 후회스러웠다. (물론 그 뒤 농장을 떠나 큰 도시에서 생활할 때는 여러 차례 방출되었다. 일에 서툰 모습이나 영어를 잘 못해서 고객과 소통에 어려운 모습을 보이면 그 날 퇴근할 때 하루치 급여를 주고는 “Don't come tomorrow."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물론 이력서나 면접 자체에서 답이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 이런 면에서 농장은 얼마나 접근이 쉬운지. 일을 구하기도 쉽고, 일하다가 잘릴 염려도 적다.) 터덜터덜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소고기와 맥주를 사면서 텅 빈 주머니를 확인하니 비참함까지 더해졌다. 죄송하다고,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겠다고, 그렇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다음 날 다시 제시간에 농장으로 출근했는데, 터키인 관리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반갑게 인사하는 게 아닌가. 까먹은 건지, 아니면 동양인이 다 고만고만하게 생겨서 내가 어제 걘지 모르는 건지. 어쨌든 토마토 농장에서 꼬박 두 달을 더 일했다. 토마토 수확량이 적어지면서 농장이 문을 닫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만뒀는데, 아니었다면 아마 더 오래 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휴학한 동안 알바로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그 두 달 동안 벌었으니까. (중간에 기계가 도입되면서 일은 좀 더 편해졌고 돈은 더 많이 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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