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둘러 걷는다는 것
그 무렵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1. 맡은 바 업무에 충실했다. 퇴사했던 회사로 복직하면서, 돌아온 탕아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답보 상태라는 느낌을 애써 지우고 싶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떳떳해져야 했다. 그래서 2. 학구열도 불태웠다. 출퇴근 시간을 비롯한 자투리 시간에는 무조건 책을 읽었다. 토요일 오전은 학원에 바쳤다. 평일 저녁에는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3. 운동도 꾸준히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도림천을 달렸다. 일요일엔 관악산에 올랐다. 출근길 30분, 퇴근길 30분은 꼭 걸으려고 노력했다. 4. 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불러내면 거절 않고 나갔다. 술을 엄청 들이붓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신작이 개봉하면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좋아하는 뮤지션과 배우를 찾아 공연장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돈 많이 썼다.
그렇게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노는 모든 시간들이 채 소화가 되기도 전에 또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놀았다. 소여물 먹듯이 꾸역꾸역 했는데, 소처럼 되새기는 시간은 바쁘니까 건너뛰었다. 소화불량인 것 같으면, 약 한 알 물 한 모금. 바쁜 게 좋고 많은 게 좋고 무거운 게 좋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북돋는 게 '약 한 알'이었고, 주변에서 부지런하다고 칭찬하고 열정적이라고 치켜세우는 게 '물 한 모금'이었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도 모른 채 뭐라도 '이루자'는 조급한 마음에만 천착했다. 하지만 플라시보 효과도 약발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경주마처럼 달려봐도, 여전히 난 길 잃고 방황하는 (몸만) 어른인 거다. 덮어놓고 '척'해봐도 삼십춘기 꼴을 못 면한다.
크로아티아로 떠날 때 여행 가이드북과 함께 크레마 카르타에 넣어 갔던 책이 하나 있었는데, 다비드 르 브르통의 『느리게 걷는 즐거움』이다. 이 책을 제목이나 표지, 서점이나 출판사 광고를 보고 선택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어떤 작가가 어떤 책에서 추천한 책이었을 거다. 소설이나 에세이는 주로 그런 식으로 고르니까. (정혜윤 작가님, 김연수 작가님 픽을 많이 따른다. 그런데 이 책을 구매한 시기를 보니 박연준, 장석주 작가님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에서 이어진 것 같은데.)
시간이 오로지 내 것이라는 차분한 확인이다. 걷기는 빠름, 수익성, 효율성이라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피할 뿐만 아니라 하등의 관계도 없다. 걷기는 시간을 버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아하게 잃는 일이다. … 걷기는 시간을 충분히 차지하되 느릿느릿 차지하는 일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 『느리게 걷는 즐거움』
걷기를 좋아하지만 시간을 바닥에 질질 흘리며 '느리게'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도시에서 도시로 버스 이동을 하는 동안 이 책을 다 읽었고, 크로아티아를 떠나기 바로 직전 두브로브니크에서야 엇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성곽길을 걸으면서.
핫플레이스를 찾아 도심 정중앙을 가로지를 때의 나는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 저절로 잰걸음이 된다. 구석구석 숨겨진 매력을 찾아보겠다고 골목길을 헤맬 때 그나마 좀 느려지지만 역시 나는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 함께 묶여 있다. 바깥으로 한 발짝 물러서 그 장소를 새롭고 낯설게 보겠다는 마음으로 케이블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면, 그때는 오히려 걷기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성곽길은 조금 다르다.
오후 다섯 시쯤, 크로아티아 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와 함께 성곽길을 걸었다. 성벽을 따라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쯤 천천히. 그 길은 성벽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붉은 지붕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만큼 높았지만, 가까이 위치한 집들 하나하나의 생활과 그 온기는 충분히 느껴질 만큼 낮았다. 성벽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면 내 눈은 탁 트인 하늘과 바다 저 편까지 멀리멀리 뻗어나갔지만, 일몰이 가까워지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와 하늘의 풍경이 오히려 내 눈동자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도 했다.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게, 정곡을 찌르고 핵심을 간파하지도 않지만, 관조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아닌 그 적당한 선에서 성곽길을 걷듯이 에둘러 천천히. 그렇게 나의 요즘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꽉꽉 채워 넣던 것을 덜어내고, 가능하면 다 비워내자. 제로에 수렴하면 정말 중요한 하나를 고심해서 골라 더하자. 그리고 그 하나에 집중하자.
미니멀 라이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즈음인 것 같다. 몇 개월 뒤 좁은 방에 가득 채워져 있던 물건들을 다 처분하고, '쉼'이 가능한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잘 안되지만) 물건을 들이는 일에 신중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이사 가기 바로 직전, 복직했던 회사는 다시 그만뒀다. 일에 대한 스스로의 가치관을 재정립하고 싶었고, 그건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백 권의 책을 해치우듯 읽기보다 한 권의 책을 꼼꼼히 읽기로 했다. 영화도, 음악도, 여행도, 운동도, 사람도, 음식도, 공부도 - 모두 다 마구잡이가 아닌 내 진짜 취향, 조금 확대해서 말하면 내 아이덴티티를 조금씩 완성해간다는 생각으로. 제일 중요한 거니까 조급해하거나 서두르지 말자고, 죽기 전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모두 들여 차곡차곡 쌓아나가자고. 그게 나고, 그게 내 삶일 거라고 믿으며.
물론, 몹시 어렵다.
한양도성길도 내게 비슷한 조언을 건넨다. 좋아하는 구간은 인왕산에. 간 김에 김환기미술관도. 자주 가지는 못해도 내킬 때 한 번 다녀오면 심신건강에 참 도움이 된다.
이제는 그만 덜어내도 될까요? 오늘 저렇게 아름다운 눈은 열에 들뜬 제게 말하네요. '더 가벼워지는 쪽으로 가요!' 저는 물어요. '어떻게 해야 가벼워져요?' 눈은 대답해요. '좋은 것이 더 가벼워요! 더 나은 것이 더 가벼워요! 진실에 가까운 것이 더 가벼워요.'
정혜윤 『인생의 일요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