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폭염을 이길 여행자 누구
대놓고 유령이 나오는 건 안 무서워요. 그런데 '차 마시면서 올리브 이파리 세 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돌아왔는데 삼백 년이 흘렀다'는 건 훨씬 더 무섭죠.
김성중 『젊은 작가의 책』
난 계절 중에서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 웬만한 더위에도 의연하다. 아니,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하면 온몸에 흥이 돈다. 만개하는 꽃과 짙어지는 잎과 울창해지는 숲을 마주하면 나 역시 살아 있는 존재임을 절감한다. 끓어오르는 아스팔트와 그 아스팔트를 단숨에 식혀 버리는 장대비에는 투지와 열정이 불끈 솟아오른다. 뭐, 여름이 좋다는 걸 과장해서 써 본 거다.
하지만 브라질의 여름은 무섭다. 한낮의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고 마는 거다. 혼을 쏙 빼놓은 더위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의 기억만 지우개로 문대듯이 쓱싹쓱싹 지워버렸다. 그날 아침 10시경 코르코바두 예수상을 본 기억은 생생하다. 그 뒤에 버스를 타고 센트로에 간 건 맞는데, 센트로에서 뭘 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태양이 높이 솟기 시작하면서 어질어질. 비 오듯 내린 땀에 온몸이 푹 젖었고, 흐물흐물 녹아내렸으며, 익다 못해 휘휘 풀어지는 듯했다.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11월 15일 광장이라든지, 빠수 임페리알이라든지 이것저것 본 게 분명하다. 페리까지 탔었다. (써 놓은 걸 보니 니테로이 현대미술관에 갈 계획이었으나 리뉴얼 공사 중이라 실패한 듯.)
다시 기억나는 건 아르꾸 지 떼지스(Arco do Teles)의 한 식당에서 맥주 한 모금 들이킨 순간부터. 잘못 먹어 명치에 콱 걸린 더위를 맥주로 내려보려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배낭'여행이랍시고 어깨에 짊어진 짐들로 혹사당한 몸은 이미 파스가 덕지덕지인데, 여기에 생전 겪어보지 못한 더위까지 필살기 공격을 해대니 '아고고, 나 죽네.'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더위를 먹으니 식욕도 떨어졌다. 주문한 음식은 너무 맛있었지만, 더위 먹어 부른 배는 더 이상의 소화작용을 거부했다. 결국 다 먹지 못했다. 아깝게. 나 답지 않게.
그리고 다시 기억상실. 역시 사진에는 국립미술관, 시립극장, 국립도서관은 물론 센트로의 큰 도로, 작은 거리, 좁은 골목들을 누빈 흔적이 남아 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건 리우데자네이루 센트로를 간 것도 아니고, 안 간 것도 아닌 꼴이 됐다.
아르코스 다 라파(Arcos da Lapa)는 확실히 기억난다. 한여름의 납량특집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흰 수도교 밑에 앉아 있던 검은 피부의 청년들. 뽀얗게 빛이 나는 수도교와 대비되어 더욱 어둡게 침잠되어 보였던 그들의 눈빛. 그리고 공기 속에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사뭇 험악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 브라질에 대한 기우를 벗어던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카메라만 찰칵찰칵.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일어나 내 쪽으로 껄렁껄렁 다가오는 게 아닌가. 지레 겁을 집어 먹고 후다닥 자리를 떴다.
세라론 계단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하고 재밌는 곳이었지만, 역시 더운 날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최대한 피하는 게 좋다. 눈에 차오른 게 분명 눈물은 아니고 땀일텐데, 그 탓에 시야가 흐려지면서 세라론 계단의 오색찬란함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리우데자네이루의 센트로 지역에 다시 올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 날의 계획을 강행했던 거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다. 한두 군데 빼먹더라도 몸 생각하며 쉬엄쉬엄 여유 있게 둘러보고, 중간중간 지칠 때면 시원한 곳 찾아 들어가 땀이라도 식혔으면 좋았을 텐데. 과거의 나, 반성하자. 그 더위에 좀머 씨 병을 된통 앓았으니, 뭐 제대로 감상했겠냐고.
하루 종일 누가 시키지도 않은 더위와의 싸움. 그 끝에 찾아간 곳은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이었다. 이곳이 내겐 천국이었는데, 성당 안이 무척 시원했기 때문이다. 세라론 계단에서 성당까지 곤죽이 다 된 상태로 걸어가면서 사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보이던 성당의 외관이 마치 SF 영화 속 머나먼 미래 다른 행성에 지어질 법한 거대하고 투박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원함에 1차 축복을 받고, 어느 정도 땀을 식힌 뒤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는 순간, 2차 축복.
이파네마로 가는 버스를 물어물어 탄 뒤, 차창을 열고 달렸다. 버스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을 맞으니 그래도 그날의 피곤이 다 달아나는 것 같았다. 더위는 순식간에 기억을 앗아가고, 바람은 부지불식간에 '더위'와 '더위 먹은 기억'을 앗아갔다. 끓어오르는 아스팔트를 한 번에 식혀버리는 장대비처럼. 그리고 불끈 솟아오른 투지와 열정. 언젠가 다시 브라질에 오리라, 그때에는 여기 말고 저기, 아마존 핑크돌고래 보러.
아, 그리고 매년 2월에 열리는 리우 카니발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 존경합니다. 브라질 여름을 이겨낸 승리자십니다. 어디 가서 더위에 강하다고 명함 내밀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