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마실 이유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산책하듯 가다가, 앞만 보고 걷는 사람들에게 부딪혀 넘어지는구나.
크누트 함순 『땅의 혜택』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던 손을 거두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그냥 좀 쉬어보겠다고 떠난 말레이시아 페낭. 목표는 오로지 '가만히 있기'였다.
중국인-인도인-말레이시아인이, 불교-힌두교-이슬람교가, 산-바다-도시가, 동-서양이, 그리고 어제-오늘이 뒤섞인 섬. 그 속에 슬쩍 끼어들어 며칠 보내기에 좋았다. 특별한 관광지도 아니고, 그래서 관광객도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현지인은 대부분 무관심.(관광객은 모두 조지타운의 벽화 앞에 모여 있다. 거기만 피하면 모든 곳이 한적하다.) 잘 된 일이었다. 뭐라도 보고 배우겠다며 빠릿빠릿 움직여야 한다는 여행자의 강박을 벗어던지기에 좋았다. 머물던 숙소 앞에서 작은 편집샵을 운영하던 칸쥬는 말레이시아를 찾는 관광객들은 죄다 코타키나발루로 간다며 아쉬워했지만, 그 아쉬움이 내겐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이틀 만에 주요 포인트들을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지만, 난 일주일치 먹을 음식을 소분하듯 볼거리들을 하루하루 나눠 담아 매일 조금씩 치렀고, 남는 시간은 오로지 '가만히 있기'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렵다. 나 같은 사람. 멍 때리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겐 없는 능력. 태생부터 그런 건지 아니면 메트로폴리탄의 자격 요건에 충족하기 위해 주입한 적응기제라는 약물이 몸속에 축적되어 바이오리듬화 되어 버린 건지. 일단 벌떡벌떡 뛰는 세포들을 가라앉히느라, 잠을 실컷 잤다. Armenian Street Heritage Hotel 606호는 '잠'을 위한 최고의 공간이었는데, 침실과 욕실이 깔끔했고, 두 방향으로 난 창문에서 페낭 조지타운의 뷰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였으며,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 사람들의 말소리나 자전거 소리, 차 소리, 기도 소리 같은 생활 소음이 타고 들어와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온갖 괴기스럽고 터무니없는 꿈에 시달리는 잠이 휴식이 될 리 없다. 그리고 깨어 있는 시간은 나도 모르게 내 몸 어느 한 구석이 바빠지고 마는 거다. 여기 가본 김에 저기도 가볼까 싶어서 발이 바빠지거나, 지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해 놔야겠다 싶어서 손이 바빠지거나,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가늠하고 내 앞날을 고민하느라 머리가 바빠지거나. 왜 자꾸 손에 책을 들고, 귀에 음악을 흘려보내고, 눈으로 한국의 이슈들을 찾아보고 있는지.
그래서 선택한 것은 역시 맥주다. 페낭의 뜨거운 공기와 내 쓸데없는 활동성을 식혀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마침 페낭은 맥주를 마시기 딱 좋았다. 몹시 더웠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고, 살갗이 지글지글 끓을 정도로. 말레이 음식이든 인도 음식이든 중국 음식이든, 매 끼 주문한 음식은 하나같이 뜨거웠다. (음식과 함께 나오는 차도 뜨거웠다.) 그런데 기름지고 칼칼한 것이 많아 맥주를 곁들이기에 맞춤이었다.
어딜 가든 맥주를 한 병(또는 한 캔) 주문하면 느긋해지는 거다. 조금씩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리기 시작한다. 조금 더 홀짝이면 (취기가 오르면서) '에잇, 될 대로 돼라 그래. 난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그리고 조금 더더 홀짝이면 아무 생각도 안 든다. 그러다 불현듯 '아, 더 마시면 안 되겠다!' 싶으면 그제야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다음 장소로. 다음 장소로 가다 보면 몸속에 돌던 취기가 가시고, 그럼 거기서 다시 맥주를 주문하는 루틴.
그런데 왜 다른 술도 아니고 맥주냐 하면 그것 말고는 다른 술이 일절 안 보였다. 국교가 이슬람교라서 그런지, 내가 못 찾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Love Lane의 어느 술집에서는 맥주 말고 다른 주종을 팔았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맥주면 충분했다. 맥주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었는데, 특히 Tiger. (참고로 말레이시아 물가에 비해 맥주 가격 비싸다.)
그리고 하루의 마무리는 1층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호텔 루프탑에 올라가는 것. (다른 여행지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내게 루프탑이라 함은 온갖 종류의 맥주와 보드카와 위스키와 와인과 칵테일을 파는 바와 개성 있는 바텐더, 건물 전체를 흔들어버릴 것 같은 강한 비트의 음악, 그리고 취하고 싶거나 이미 취한 사람들의 불콰해진 얼굴들과 풀어진 몸짓으로 정의되는데, Armenian Street Heritage Hotel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휘영청 뜬 달빛 아래에 몇 개의 테이블이 고작. 대부분 사람이 없었고, 가끔 검은 피부의 청년 몇몇이 올라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다 내려갈 뿐이었다. 난 여기에서 조지타운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다 마시면 아래층으로 내려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잠들었다. 루프탑이 11시면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에, 그전에 그 날의 맥주타임을 마무리.
타이거 맥주로 쉼표를 찍은 시간들이 도움이 된 건 분명한 것 같다. 숨을 고르고 나니, 결심이 섰다. 다시 쓸 결심.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기분이 떠날 때보다 훨씬 괴로웠지만, 그래도 덮어 놓고 미뤄왔던 걸 이제라도 시작해야만 한다는 마음과 시작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얻어 온 거다. 정답이 아닐 수는 있어도, 해결책이 필요하다면 생각을 하는 시간보다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방법인 듯하다. 그리고 스스로를 부스팅 하겠다고 휘둘렀던 채찍은 개나 줘 버리기. 채찍을 들었던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자.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싸워야 할 대상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나'를 향해 칼끝을 겨눌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자신과의 싸움보다 자신과 잘 지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