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짤막하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예강 Aug 19. 2019

022. 무해한 사람, 무해한 하루

  잠을 충분히 잤고, 건강한 식단으로 요리도 했다. 잡생각을 억지로 몰아낼 필요 없이 고요한 상태로 한참 누워 있을 수도 있었고, 예능 프로그램 보면서 눈물까지 흘려가며 실컷 웃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나에게도 무해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함께 있는 그 순간순간에 나 스스로도 충분하다고, 이미 나로서 내 삶이 충만하다고 느끼게 해 준다. 나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더 나은 나를 기대하게 한다. 나를 고무시킨다. 어떤 화두를 던져도 그 누구 하나 대화에 소외되지 않는다. 공감과 배려 위에 말들이 만들어지고, 주고받는 단어와 문장들은 우리 모두의 흥미와 관심사가 된다. 다큐처럼 진지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코미디처럼 가벼워지고, 진담과 농담이 적절히 뒤섞이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다. 상대방에게 감탄하기도 하고, 나 스스로에게도 깜짝 놀라기도 한다. '짜릿해. 늘 새로워. 최고야.' 그리고 그 대화는 종료가 된 후에도 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친다.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항상 만나러 가는 길보다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더 즐겁다. 난 그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오래오래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 만난 친구들도 그렇다. 나 포함 셋이고, 고향에서 학생일 때 처음 만났지만 서울이라는 타향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연이 더 깊어졌다. 그러나 오늘은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는데, 그중 한 명이 곧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한동안 머나먼 타국에서 살아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마 최소 몇 개월, 길면 몇 년 동안은 못 보게 될 텐데 너무 아쉽다. 물론 그 친구에겐 좋은 기회고, 진심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오는 사람들. 그중 대부분은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머지 일부만이 얼마 동안 곁에 머물지만, 또 그중 대부분은 내게 유해하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이렇게나 결이 많구나, 상대방이 의도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내가 나를 갉아먹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기도 하는구나, 싶다. 난 상대방을 검열하고, 또 나 스스로를 검열하면서 인간과 인간관계에 잣대를 들이댄다. 결국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권태롭다. 그저 적당한 표정과 말과 행동으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한다. 그래도 그 장막 너머에는 내게 무해한 사람들이 있다. 질퍽질퍽 발이 빠지는 갯벌에서 찾아낸 진주 같은 사람들.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제 나는 안다. 그런 사람들이 내게 바투 있기를 바라지만 그 역시 얼마나 어려운지도 이제 나는 안다. 일단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아등바등 애쓰고 부단히 노력해야겠다.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도, 나아지고 싶으니까.


---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무해한 사람'이란 단어를 가져와 이 글을 풀어냈다. 작년 여름 꼭 1년 전에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단편 「고백」에서 작중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고 정의 내린 부분이었는데, 물론 내가 쓴 글 속에서의 '무해하다'와는 사뭇 속뜻이 다르다. 


  단둘이 같은 반이 되면서 미주는 진희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갈 수 있었다. 미주가 보기에 진희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겉으로는 오히려 둔감해 보였다. 자기감정만큼이나 타인의 감정에도 예민해서 그런 것 같았다. '나 예민한 사람이니까 너희가 조심해야 돼'라는 식이 아니라, 네 마음이 편하다면 내가 불편해져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예민함을 숨기려고 했다. 대수롭지 않은 척 상대의 얘길 들으면서도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을 물어뜯던 진희의 모습을 미주는 기억한다.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희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미주는 그 착각의 크기만큼 행복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미주가 바라보는 진희의 모습이 꼭 나인 것만 같아서. 

매거진의 이전글 021. 어른, 크로사, 퍼붓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