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상담 때 얘기했던 말은 좀 상처였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보라고 했던 말 같은데 당시에는 저를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난 가끔 이런 실수를 한다. 뉘앙스가 잘못 전달된 경우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 한 가지 방법만 생각할 필요 없이, 폭넓게 다른 방법들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렇지만 내담자의 입장에서는 왜 다양한 방식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거나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다.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좀 더 조심스럽게 얘기했어야 했다. ‘왜’라는 부사로 문장을 시작하기보다는 다른 방법은 없겠냐는 식으로 넌지시 물었어야 했다. 왜라는 부사는 책망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 아직 라포(rapport)가 굳건히 형성되지 않은 내담자에게는 좀 더 신중하게 말을 했어야 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온 내담자에게, 그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내담자에게, 내가 또 다른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에 상담이 끝나고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신중하게 말하기 위해 내 컨디션 관리를 더 잘했어야 했나, 내가 상담 진행에 좀 소홀했나, 뭐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을까, 라는 자문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내가 비슷한 종류의 실수를 했던 다른 내담자와의 상담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말이 좀 아프게 다가왔다고 말했지만, 이전에 비해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결국 심리치료의 효과는 치료자의 능력이 아니라, 별 볼일 없는 치료자를 끈기 있게 견디는 내담자의 특성에 달려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던 중, 문득 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이 생각났다.
Good enough mother.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충분히 괜찮은, 혹은 적당히 괜찮은 엄마.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컷은 양육자의 역할이 아동의 심리 성장과 정서발달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면서, 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을 말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perfect가 아닌, good enough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동이 건강하기 위해서 양육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필수적인 것들만 채워준다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상담자인 나도 완벽하지 않아서 때로는 내담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이 그럭저럭 충분했기에 내담자들이 나아지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고 나서 더 잘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책하고 속상해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렇지만 한 번 더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것보다 더 잘할 수 없었을 때가 많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존재니까 말이다. 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을 배운 후로는 더 잘 해내지 못했던 나 자신을 탓하게 될 때마다 이 개념을 생각한다.
good enough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아. 완벽할 수 없어. 최선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