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커서도 이겨야 할 건 이겨야지
큰 딸은 나에게 자주 문자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이야기를 한다. 물론 본인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딱 딸아이에 관련된 일들만 다 듣고 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서는 학교에서 구기대회를 한다. 1학기 때도 체육시간에 다른 반이랑 어이없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난 구기대회를 하는 게 별로 달갑지 않다. 게다가 하필이면 2학년 종목은 핸드볼이다. 핸드볼은 아무래도 몸싸움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한참 예민하고 승부욕 강한 아이들이 경기를 하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조마조마하다. 그래서 난 선수로 안 뛰길 바랐는데 꼭... 엔트리에 올라가곤 한다. 아무래도 운동신경도 있고 키도 크다 보니 엔트리에 안 들어갈 수가 없다. 가뜩이나 학교에서 하는 핸드볼도 그만두길 바라는데, 이렇게 아예 구기대회로 하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이번엔 아이 반이 실력이 좋은 건지 예선부터 본선, 그리고 어쩌다 보니 결승까지 올라갔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아이가 좋아하니 나도 좋긴 하지만, 매번 경기에서 이길 때마다 상대편 반 아이들은 아주 이긴 반을 잡아먹으려고 한다. 난 진짜 무서운 게 세상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욕들도 하는 걸 보고 와... 그냥 할 말을 잃었다. 다행히 우리 딸은 욕을 하진 않는다. 물론 아예 안하진 않겠지만 입에 달고 사는 애들에 비하면 욕을 하나 싶을 정도니까... 게다가 대회 상품도 기껏해야 과자나 양말 정도라던데 왜들 그렇게 죽자도 덤벼드는 걸까.
오늘 결승이라고 문자가 왔는데, 자기네 이번엔 질 거 같다며 전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속상해한다. 그냥 최선을 다하라고 했고,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열을 올리나 싶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나도 중, 고등학교 때 그랬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였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지만 합반은 아니었다. 남자가 6반, 여자가 4반으로 총 10반이었는데 2학년때부터는 문과, 이과를 선택했고, 나는 이과반이었다. 여자는 이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반만 이과고 나머지 세반이 문과다. 그래서 1~6반까지는 남자반 7~9반까지는 여자 문과, 10반만 여자 이과반으로 여자 이과반은 웬만하면 클래스메이트가 2년 내내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여자 반 중에서는 항상 뭐든 제일 잘하는 반이었기에 승부욕도 강했다.
체육대회날. 여자 씨름 경기가 있었다. 왜 여자 씨름경기를 넣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있었다. 우리 반에서 힘도 세고 자신 있다는 친구가 선수로 나갔는데, 상대방 선수도 힘이 비슷한 데다 승부욕이 강해서 그랬는지 거진 1시간을 서로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엔 우리 반 친구가 졌는데, 그때 자존심에 버티던 친구는 쓰러지고 우리 반 전체는 난리가 났다. 꼭 상대방 친구가 쓰러지게 만든 것 마냥 그 친구는 공공의 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그저 스포츠였고, 경기였을 뿐이었으며 깔끔하게 진걸 왜 인정하지 못했던 걸까.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그냥 체육대회의 해프닝일 뿐인데... 아무튼 그날은 아마 나 외에 한 3명 정도 빼고는 다 울고불고 난리 났던 거 같다. (나도 분하긴 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아마도 딸아이도 이런 감정이겠지. 딸아이도 1학기때 내가 겪었던 일과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내가 속해 있던 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 친구의 입장으로 굉장히 억울해하고 힘들어했다. 내 딸이 그 입장이 되니 정말 너무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그 친구도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을까, 본인도 힘들게 이긴 경기였는데...
승부가 뭐라고 매번 이렇게 열을 올리게 되고, 온 힘을 쏟게 되며, 듣도 보도 못한 감정까지 느껴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성인이 된 나도 아이한테 그냥 최선을 다 해라라고 말은 했지만, 괜히 질까 봐 걱정한 건 사실이다. 결국 이겼다는 연락이 왔다. 신경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신경이 쓰였던 건지 이겼다니 안심도 되고 기분도 좋고, 기특하기까지 했다.
승부욕은 결국에는 자존심 싸움인 건가... 그래 이왕이면 이길 수 있는 건 이기는 게 맞겠지. 근데 그걸 어떻게 이기고, 졌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단단해질 필요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