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더위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폭탄 맞은 전기세는 8월의 미친 더위를 더욱 실감하게 했다. 이러다 가을은 찍 소리 한번 못 내고 겨울이 오는 건 아닌가 그랬다. 거짓말처럼 그렇게 여름 끝자락 가을 같은 모습은 건너뛰고 겨울 문턱 가을의 모습으로 급하게 세상이 옷을 갈아입는다.
징검다리 연휴가 되어버린 오늘, 다 나가고 큰 아이만 쉬길래 같이 분리수거에 동참시키려 했더니, 시험이 코앞이라 얼른 독서실로 가야 한단다. 속으로 쳇 하고는 손이 부족해 분리수거부터 하고 와서 다시 호두를 데리고 나가야지 했는데, 이미 분리수거 챙기는 나를 보고 문 앞에 가 앉아 있다. 한 손으로 꾸역꾸역 챙기고 한 손에 호두 리드줄을 붙잡고 나서본다.
11월에 태어난 강아지 호두는 첫 번째 가을을 만난다. 여름엔 산책 나가면 들어오기 바쁘더니 아침저녁으로 나가자 보챈다.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면 훅 하고 들어오는 찬 공기가 나만큼이나 반가운지, 호두는 냅다 달린다. 리드줄이 당겨질 만큼 뛰어가서는 뒤돌아 나를 본다.
사춘기도 그렇다고 아직 갱년기도 아닌데, 바람 따위에 눈물이 나는 게 우스워 꿀꺽 눈물을 삼키고 잔뜩 바람을 느낀다. 뼛속까지 환기가 되는 느낌이랄까. 큭. 답답했던 모든 게 잠시나마 다 날아가버리는 거 같아서 참 좋다.
햇살도 바람도 딱 좋은 감사한 날. 좁은 산책길에 산책 나온 어린이집 아가들과 마주쳤다. 아파트 내 어린이집 아이들인가 보다. 두 돌이나 되었을까 싶을 만큼 작은 아가들이 선생님 손잡고 아장아장 걸으며 마주 오는 호두를 보고 멈칫한다. 얼른 호두를 안아 들고 아이들과 인사하고 지나쳤다. 꿀꺽 잘 삼켰던 눈물이 왜 그 장면에 다시 터졌을까.
조만한 쌍둥이 양쪽에 잡고, 유치원 다녀오는 큰 아이 데리러 소풍처럼 매일 나가던 10년도 더 된 가을날.
작은 가방에 요구르트도 챙기고, 간식도 챙겨서 아파트 이곳저곳 다니며 개미도 보고 벌도 보고. 꽃 위에 앉은 벌을 보고, "위험해. 내려와" 하던 작은 딸이 너무 사랑스러워 웃었던 날이 있었다.
그 아가는 지금 폭풍 사춘기를 지나가는 중이시고, 그때 유치원을 다니던 큰 아가는 고등학교를 다니신다. 밤톨처럼 머리를 깎아 귀엽던 아들은 지금 머리를 길러 묶으실 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고되지 않은 고비고비가 없다. 삶이라는 건, 평지가 가끔 섞인 진흙탕이 맞나 보다. 그래도 또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건 세 아이 육아로 죽을 듯이 힘든 진흙탕 속에서도 하늘에 빛나는 별 같던 그런 순간순간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고된 삶을 짊어지고 나아간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해결해야 할 문제와 가슴에 얹은 무거운 책임감 따위로 무거운 걸음을 떼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