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_가족이라는

그 무겁고도 찬란한 단어.

by 제이쌤
안녕, 아름다운 정원. 안녕, 황금빛 곤줄박이. 아름다운 정원에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나는 섭섭해하지 않으려 한다.

책장을 덮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 여운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조금은 당황러웠다. 며칠을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원에 데려다주며 큰 딸에게도 이야기했다. 중학생 딸도 책을 집어 들고 한숨에 읽어 버렸다.


한참 사춘기 터널을 지나온 중2 내 딸은 지금 중2병이 아니다. 어릴 적 한 몸이다시피 하던 그때의 거리는 아니지만,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이좋은 모녀 사이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눌 만큼 큰 친구 같은 내 딸. 눈물겹다.


그 아이가 느낀 감동과 내가 느낀 감동의 결은 당연히 다르겠지만, 그래서 책이 좋다. 정답 따위는 없으니까.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서울의 한 달동네에 살고 있는 동구네 가족 이야기이다.

동구는 한씨네 집안의 4대 독자이나, 열 살이 다 되도록 글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난독증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바보 천지 취급을 받는다. 집안의 걱정거리로 할머니에게 이름보다 '이 새끼'로 불리며 고단한 삶을 살고 가고 있는 어린 주인공이다.


반면에 6살 터울로 태어난 여동생은 3살 무렵부터 글을 읽어내는 기염을 토하며, 동네에서 유명한 영재로 통했다. 미워하고 질투할 만도 한데, 동구는 그런 동생 영주를 너무나 지극히 사랑했다. 그 어린 영주는 글만 잘 읽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줄 모르는 동구네 4명의 가족 사이로 선물처럼 찾아와 그 모래알같이 서걱거리는 사이를 하나로 뭉쳐주는 역할을 해내는 보석 같은 아이였다.


동구 엄마는 악독하고 모진 시 어머니를 견디고, 이유를 막론하고 그 사이에 어머니 편만 들며 욕지거리와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견디며, 답답하고 묵묵하고 굳세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내고 있었다.


동구에게는 난독증을 마음 다해 치료하도록 도와준 선생님이자 정신적인 지주 같은 존재인 박 선생님이 있었다. 그런 박 선생님은 어느 날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다 소식도 알 수 없이 동구의 곁을 떠나 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동구에게 늘 빛나던 존재인 동생 영주도 그놈의 감나무에 달린 감을 가져보려다 동구의 어깨에서 떨어져 허망하게 은 생을 마감한다.


영주를 보내던 그 벽제에서 동구 아버지는 몸의 일부가 그대로 녹아 물이 되어 나오는 것처럼 울었다.

아버지는 그 감나무를 처벌하고, 영주의 머리가 부딪혔던 그 계단도 망치로 탕탕 부숴버리고도 슬픔을 이길 수 없어 매일 술로 보냈고, 동구 엄마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허깨비처럼 버텼다. 동구 엄마를 향한 할머니의 욕지거리는 더 심해지고, 그 사이에 동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이 뭘까. 토록 완벽하게 지켜내려 발버둥 치던 내 가족. 안전한 거리 같은 게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한 몸처럼 묶여서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거 밖에는 답이 없다 믿던 나의 미련한 10년.


그런 나에게 동구 엄마가 버텨내는 처절한 삶의 모습이 묵직하게 다가다. 참는 게 괜찮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들의 무게가 나 자신보다도 무겁고 소중한 것 일 때는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게 '엄마'라는 사람인 거니까. 책임감이란 건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이 끌어안고 싸우는 바윗덩어리 같은 것이니까.




자식 먼저 보내고 겨우 목숨 부지를 위해 욱여넣어보려 밥상을 마주하고 있는 어미에게 그 시어머니는 자식 잡아먹은 년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며 치료되지 않을 생채기를 냈다.


"에이, 더러운 년, 에이, 재수 없는 년, 재수 옴 붙은 년, 니년 때문에 우리 영주가 그렇게 된 걸 생각하면 니년을 찢어발겨도 성이 안 풀린다!"


동구 엄마는 허깨비처럼 허우적거리며 눈이 하얗게 덮인 장독대로 달려가 고추장 독 하나를 번쩍 들고 와 시어머니 바로 앞의 방바닥을 향해 모질게 패대기쳤다. 짐승과 같은 괴성과 함께 허공에 헛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던 그녀는 찬바람 속으로 달려 나가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는다. 그날 그녀가 깨버린 것은 고추장 독이 아니라, 더 이상 들고 버틸 수 없었던 그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더 이상 참는다는 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곪은 상처에 고름이 터져 나오는 걸 참는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처럼.


나도 나의 견딤에 한계라는 것이 있다는 걸 인지조차 하지 못했었다. 힘들면 도움도 청하고, 징징도 대면서 사는 게 더 용기 있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런 엄마를 기다리며 해체 위기에 놓인 가족을 위해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 건 다름 아닌 동구였다.


동구의 마음속에는 늘 박 선생님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일을 생각해 내고, 누구도 짚어내지 못한 것을 짚어내어,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모두가 유쾌하게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금 동구 곁에 없지만, 동구에게 지혜가 필요한 순간에 지혜를 구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동구의 지혜는 아름다웠다. 아무런 의욕도, 즐거움도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인 할머니에게 찾아준 희망이라니.

흙을 만질 때의 할머니 눈빛이 반짝인다는 걸 동구는 알아차렸다.


아마도 꽃 피는 봄이 오면, 동구와 할머니는 할머니의 고향 동생인 모실 할머니와 함께 고향인 노루 너머로 내려가 농사일을 시작할 것이다. 외갓집에 요양 중인 동구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비운 사이 엉망이 된 집안 구석구석을 손 보고, 동구 아버지는 부부가 된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 없이 오롯이 자신의 시선으로 부인의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동구는 상처로 훅 커버린 그 어린 가슴으로 가족들의 마음을 구석구석 돌볼 것이다. 지혜가 필요한 순간순간 가슴속에 박 선생님을 소환해 지혜를 구할 것이고, 온정이 필요한 순간순간 애처롭도록 사랑스러웠던 동생 영주를 소환해 가슴을 데우고 그 가슴으로 온기를 전할 것이다.



가족, 그 무겁고도 따뜻한 단어.

모두가 서툴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지켜내려 했던 동구네 가족. 그 가족을 보며 나의 가족의 의미를 생각했다.


식물들은 번식을 위해 씨앗을 자기 선 자리에서 먼 곳으로 퍼뜨린다. 같은 자리에 엮여 서서는 영양분도 부족하고, 뿌리가 엉켜 잘 자라지도 못한다는 걸 똑똑하게 안다.


한데 꼭 뭉쳐 서 있으면, 누구 하나 쓰러지면 다 같이 쓰러지는거다. 적당한 안전 거리에 각자 서서 잘 자라나다가, 누구 하나 힘들면 건강한 다른 가족들이 바로 서게 도와줄 수 있는 그런 건강한 가족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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