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이랑 뮤지컬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좋은 곳에서 비싼 밥도 먹고 공연도 보고, 돈은 썼지만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는 딸들의 웃음에 뭐 사는 게 별거냐 생각했다.
아파트 입구에 어린 아들과 함께 앉아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속상한 일이 있나 보다.저 어린아이 앞에서도 참을 수 없이 힘든 일이 있나 보다.
완벽한 엄마이고 싶어 발버둥을 치며 산 세월이 꽤나 길었다. 나사 하나 빠진 듯, 손해도 좀 봐가며 살아가는 게 더 편한 완벽하지 못 한 인간이면서, 육아는 왜 그리 완벽하고 싶었을까. 바쁜 남편은 육아에 거의 동참하지 못했다. 쌍둥이까지 셋을 혼자 그저 키워내는 것만도 장한 일인데, 무슨 엄마표 교육까지 한다고 날밤을 새고, 육아서에 파묻혀 살고, 남의 손에는 안맡기고 싶어 혼자서 죽을힘을 다하며 살았을까.
아빠가 바쁘면, 아빠몫도 내가 해주면 되고, 셋이 나눠가져야 하는 엄마 시간이 부족하면 내가 좀 덜 자고더 부지런하면 된다 생각했었다. 어떻게든 완벽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잘 못 될 거 같았다. 나는 없어도 괜찮았다.
그런 나를 다 태우고 나서 알았다. 세상에 완벽한 가정이라는 건 애초에 없다는 걸 말이다. 내 원 가정도 그랬고, 남편의 원 가정도 그랬고, 내 친구들의 가정도 그랬다. 성인군자가 아닌 그냥 미숙한 사람들이 섞여 서로 부딪히고 치이고, 뚝딱뚝딱 그런대로 만들어가며 사는 게 세상이었다. 완벽해 보이는 찰나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미숙함 속에서 살아가는 건데, 나는 있지도 않은 환상을 아이들에게 주겠다고 그 발버둥을 치고 살았던 거다.
지인들과 만나 남편 욕을 한 바가지씩 하며, 우리는 모두 이 인간과 살까 말까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했다. 예전의 나에게는 없는 선택지였다. 행여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인생 선택지에 가정이 깨어지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한다. 물론 아이들이 이만큼 크기도 했지만, 내 생각이 달라졌다. 내일 당장 이혼하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선택지에 그거 하나 더 해놓고 나니 좀 내려놓아진다.
책임과 나의 행복 그 사이 어디쯤에 서서 그저 오늘에 최선을 다해보려 한다. 기말고사 앞둔 딸을 데리고 공연 보고 늦게까지 광화문 거리를 배회하며 놀다 온 게 잘한 일인가 싶으면서도, 혹시 훗날 엄마가 미워지거나, 세상에 혼자인 듯 외로운 날이 있거든 이 추억이 작은 힘이 되겠지 생각한다. 함께있어 행복했던 이 추억이 힘이 된다면 그게 더 중요한 일일 거라고 믿어 본다.
오늘 나는 아이들과 행복했지만, 어느 날엔가는 저 울고 있는 엄마처럼 운다. 사는 게 힘겨워서, 버티는 게 지겨워서, 삶이 무거워 먼저처럼 사라지고 싶은 날도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산다. 어느 날은 불행하고, 어느 날은 행복하고.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이 힘들다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대신에 드러내 놓고 또는 은근히 자신이 지닌 어려움, 걱정, 문제가 엄청나다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그들은 마치 삶은 기본적으로 편안한 것처럼, 다시 말해 삶은 응당 편안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첫 장에 나오는 문구다.
삶은..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때론 즉흥적으로, 때론 고뇌하여 선택하며 살아간다.
얼굴 모르는 그 울고 있던 엄마에게, 할 수 있다면 오늘 내가 가진 행복을 좀 나눠주고 싶었다. 힘내라고. 내일은 또 살만해질 거라고.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 같다고...
아! 오늘 브런치에서 내 허접한 글을 다음 메인이 띄워주셨는지, 조회수가 5000을 찍는 기염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