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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Nov 11. 2021

오화. 바람피우기 좋은 날

그녀는 도망치고 싶다.

십 년도 더 된 소개팅해서 한 번 본 남자들도 몇몇 나왔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저 이십 대의 그녀가 있는 소개팅 날의 장면이 펼쳐지고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기억하지 못할 남정네들이 실루엣으로 그녀의 꿈에 잔뜩 다녀간다. 예전 회사 동료와 상사도 몇몇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녀 기억 속에서 까맣게 사라져야 마땅할 남자들이 쉼 없이 계속 등장했다. 내용도 없고 풍경도 없는데 그냥 불쑥불쑥 그림자 같은 이목구비가 희미한 형태로 나타나는 그런 꿈 같지 않은 꿈.  


아침 일찍 아이 둘을 앞세우도 잠에 덜 깬 상태로 아래층에 내려간 신랑 덕분에 침대에 누워있던 그 두 시간은 잠도 아니고 쉼도 아니다. 얇은 잠을 청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꿈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온갖 스쳐간 남자들이 다녀갔다. 마치 내가 바람이라도 핀 양 그녀는 마음이 안 좋다.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아침 7시 반이다. 밤새 잠투정이 심해진 둘째 아이 덕분에 어젯밤도 한 시간마다 일어나기를 반복한 그녀는 밤새 누구한테 두드려 맞은 듯한 몸살기를 누르며 천근만근의 몸을 어그적 어그적 침대 밖으로 밀어 본다. 아래층에서는 새벽 5시 반부터 깬 얼리버드 남매가 벌써 한바탕 울음바다를 벌이는가 보다. 


그냥 다 두고 도망쳐 버리고 싶다. 지금 그냥 이 침대 밑으로 파져 있을지 모를 깜깜한 동굴 같은 곳으로 훅 떨어져 사라져 버리고 싶다.


그녀는 가출을 몇 번 했다. 몇 번의 이유 없는 괴성과 흐느낌의 에피소드가 있은 후, 그녀는 둘째가 잠들고 나면 조용히 집을 나가 혼자 술을 마시고 들어오곤 했다. 나간다는 말도 않고, 어디 가는지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채 그렇게 집을 나서는 저녁이 잦았다. 그냥 이렇게 사라져 버려야지 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오지만, 몹쓸 자석이라도 단 듯 그렇게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신랑은 언어 선택에 신중했고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까칫 발로 걷는 나날이다. 서로의 언어를 듣고 되받아내는 대화는 거의 불가능해졌고 그녀는 귀는 꽁꽁 닫은 채로 생존을 위해 기계적으로 입만 벌리는 일방통행의 소통만 고집했다.


둘은 이곳 싱가포르에서 퇴근하고 어울려 놀던 딱히 친구도, 친구가 아니지도 않은 그런 애매한 무리에서 우연히 몇 번 만났다. 세네 번째 만남까지는 각자 친구들과 놀다가 어쩌다 다 같이 만나서 어울려서 그때마다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만난 둘은 서로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사이였다. 어쩌다 페북으로 친구 신청이 오간 후, 그녀의 잦은 해외 출장 중에 업무가 끝나고 호텔방에서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는 시간에 서로 문자를 주고받기를 몇 날 며칠 하다가 친해진 사이다. 서로 사랑해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둘 다 타향살이에 외로운 터에 주중 출장에서 돌아온 주말에 종종 만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이 든 남녀는 자연스럽게 밤을 같이 보내는 사이가 됐다.


첫사랑의 애틋함도 없고 첫눈에 반한 그런 마법 같은 순간도 없었다. 시작부터 실용적인 어른들의 연애였기 때문일까. 그녀의 꽃청춘 연애사에서는 울며불며 영화 몇 번 찍었을 법한 현실적인 장애물들도 요령껏 순리 꺼 비켜갔고, 그렇게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둘은 엄마 아빠가 되었다.


둘째가 5주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기간 내내 싱가포르는 코비드 락다운 상황에 보호자 한 명만 병원 출입이 가능했고 24시간마다 그녀와 신랑은 교대하면서 병동 출입구 옆 벤치에 앉아 인수인계하는 30분의 시간이 서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응급 상황에서도 각자 엄마와 아빠라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건강해진 둘째를 안고 집에 돌아와 다시 모두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 남자는 서로에게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응급 상황이 종결되자, 둘은 그 인수인계하던 30분의 시간만큼도 서로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그녀는 신랑의 손끝이 닿는 것조차도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녀 쪽으로 걸어오는 그와의 대면을 피하려고 갑자기 자리를 일어서거나 바쁜 척하는 어설픈 연기력은 늘지도 않는다. 



Dr. Ooi와 여섯 번째로 마주 앉은 그녀는 우리가 둘 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심을 감출 수 있고 그래서 내 말의 진위를 혹여나 의심하지 못할 테니. 오늘은 그녀가 같은 공간에 있기 힘든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신랑이 무슨 말이든 걸어오면 바로 그녀 가슴에서 응어리가 맺히면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그 신체적 반응에 대해 얘기했다. Dr. Ooi는 STOP 사인을 화이트보드에 그렸다. 


S - Stop, freeze, don't move of muscle 그대로 멈춰

T - Take a step back, breath 숨을 크게 들이숴

O - Observe self, others, & environments 내 자신, 상대방, 그리고 주변을 살펴봐

P- Proceed mindfully   그리고 뭐든 하렴


그녀 가슴에 뭔가 응어리가 뭉치는 게 느껴지면 바로 그대로 멈춰라. 동요에 나오듯이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고 기다리자. Dr. Ooi는 이 주 후에 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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