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한 권
세 줄 평 : 어린 화자의 1인칭 시점 소설하면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대표작으로 배웠지만, 또 다른 대표작이 있다면 '새의 선물'일 것이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똑똑하고 그런데 어린, 주인공에게 빠져든다.
블로그 이웃님을 통해 추천받은 책인데, 역시는 역시.
은희경 작가님이 유명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섬세한 표현이나 묘사가 '역시'라는 말이 나오게 만든다.
이 책의 여러 가지 매력과 다소 속상한 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첫 번째 매력은 주인공이다.
어린 주인공 소녀 '진희'의 1인칭 시점으로 사고 흐름에 따라가다 보면 공감이 되면서도 귀엽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영리하기도 하지만, 또 제 나이 때의 순수함과 미숙함도 보여주는 주인공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로 자신을 분리하고, 상처받음을 숨기고 있는 아이.
어른스러움으로 자신의 상처를 덮고, 어른들의 치부도 냉철하게 바라보는 아이.
그 아이를 따라가며 우리는 재미와 삶의 다양함을 함께 느낀다.
둘째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살아 숨 쉰다는 점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기는 쉽지 않다. 여러 가족이 모여서,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아는 (진짜로 등장인물끼리 서로 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어린 여자아이 '진희'의 시선으로 그려지지만 허석, 이모, 삼촌, 외할머니, 엄마, 아빠, 장군이네 가족, 광진테라 아줌마, 미쓰 리 언니, 최 선생님, 이선생님, 신화영 등등....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인물들이 살아 숨 쉰다. 진희가 똑똑해서도 있지만,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 그들이 스스로도 알지 못할 부분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셋째는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과 배경 묘사이다.
외할머니의 집과 그 주변 마을, 집안의 모습이 드라마의 장면처럼 그려지는 묘사들도 일품이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마당에 있는 우물가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과 그것을 관찰하는 진희, 문을 열고 괜히 스트레칭하는 척하면서 훔쳐보는 최 선생님까지 그려질 것만 같다. 어린 시절 가족끼리 모여서 보던 일일 가족드라마나 시트콤을 다시 보듯이, 소설인데도 장면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것이 너무 매력적이다.
모든 것이 은희경 작가의 엄청난 필력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어 교사로서 다양한 소설을 읽지만 이렇게까지 장면이 잘 그려지고 다양한 인물 군상을 그린 소설을 만나기 쉽지 않다. (실제로 요새는 교과서에도 실리고 EBS 국어 영역 수능특강 지문으로 출제되기도 했다)
인물들의 삶은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생기 있고 에너지 있다'. 재미있다고 표현하기에는 각자의 삶의 무게가 있고, 행복하고 가벼운 이야기만 오가지 않는다. 하지만 섬세하고 치밀하고 심각하게 그려진다기에는 외부인인 '진희'의 시선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진희는 자기 자신의 상황조차도 외부인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너무 무거워지지 않기도 한다. 무게감 있음과 재미있음의 선을 미묘하게 오가는 것이 이 표현의 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좀 속상한 부분이 두 가지 있는데(단점이라기보다 정말 말 그대로 속상하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된다.)
첫째는 그 당시 여성들의 삶이 너무 고단하고 안쓰럽다는 것이다.
식모살이하는 이야기, 강간을 당한 후 가해자와 강제로 결혼하게 되는 여성, 가정 폭력을 당하고 있음에도 시댁에 구박받고 남편을 하늘같이 모시는 삶, 남자를 잘 만나 팔자를 고치는 것이 목표인 사람, 성추행이나 성희롱이 이루어지는 것 등...
그때는 그게 지금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그냥 현실을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게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왜 그 시대의 여성들은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하고 안타까우면서 화가 날 수밖에 없어서 속상하다.
주인공이 성에 대해서 개방적(?)인 인물로 성적 고정관념을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모습도 진희에게 남아있는 트라우마의 일부, 그 시대의 억압된 성을 보여주는 것 같이 보였다.
둘째는 개인적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다.
나는 이 묘사가 너무나도 잘 그려지고, 인물 묘사와 날카로운 관찰자의 시선 등 매력이 느껴지는데, 지금의 중고등학생 아이들에게 이 작품을 읽히려고 한다면 아이들이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을까 싶다.
좀 주제를 벗어나는 내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요새 학교에서는 예전에 우리가 모두 같이 배우던 소설들을 잘 가르치지 않는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라는 작품은 당연히 모르고 (심지어 춘향전, 심청전도 헷갈려하는 아이들이 많다.), 일제 강점기를 다룬 소설이나 시골 풍경, 근대화 이전의 모습을 다룬 소설을 배우지 않는다.
물론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고, 산업화 시대나 일제 강점기처럼 시대의 굴곡을 그려내기보다는 개인의 다양한 고민과 다각화된 사회를 그려내는 다양한 소설을 배운다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의 폭이 아이들과 내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사극도 보지 않는 아이들은 단어부터 낯설고 장면을 상상할 수 없어 소설을 영어 소설 해석하듯이 단어로 띄엄띄엄 읽는다. 이 작품에서 그려내는 셋방살이, 마당에 있는 우물이나 뒷마당의 펌프, 집집마다 비밀이 없는 분위기..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요새는 드라마도 안 보고, 옛날을 느낄 수 있는 매체나 콘텐츠도 거의 없으니 말이다..
할머니 세대(나에게는 어머니 세대인데..)는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공감해 줄까... 참 함께 나누고 싶은 소설인데, 선뜻 아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 주기 망설여진다는 것이 속상하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다양한 인물 군상의 삶을 보고 싶은 사람, 과거 60~70년대 삶을 추억하고 싶은 사람 등 다양한 독자들에게 매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