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흘러 흘러 온 이야기
사춘기가 스쳐가기 전의 나는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 같았다. 이상하게도 동생들은 날 참 좋아해줬고 그들을 이끄는 난 마치 골목대장처럼 쏘다니고는 했다. 그 애정이 기쁜 내게 명절은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 대가족인 소할머니댁의 7남매와 그들의 자녀, 그리고 조카들까지 모두 큰 집에 모였기 때문이다.
동생들을 이끌고 안전히 놀러다녀오는 사이 주방엔 성인 여성이 북적북적 모여 제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거실에는 성인 남성이 와글와글 수다를 떨고있다. 뼛속까지 가부장적인 친가 어른들의 모습이 때로는 거북하기도 했다. 딸만 둘인 첫며느리를 어마무시하게 들들 볶았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딸과 엄마가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 할지라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속이 상하고 몸이 무거워지는 일이었다. 외할머니 한정 애교쟁이 손녀인 나는 친가의 조부모님과는 접점이 크게 없으며, 내게 소할머니댁이 반가웠던 이유는 그저 사촌동생과 소뿐이었다.
차로 두 시간 걸려 도착한 옛 시골 마을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중심을 잡고, 비탈길을 올라서면 소 똥 냄새가 풍긴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지나 소똥을 요리조리 피하다보면 동그란 눈의 소들이 힐끗 반겨준다. 신문지가 덕지덕지 붙여진 옛 시골집 마당엔 누런 소들이 열두 마리정도 서 있다. 소할아버지의 방, 창고, 주방하나 그리고 주방 안 작은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나의 소할머니.
아빠를 똑닮은 소할아버지와는 왠지 어색하고, 소할머니와는 대화랄 것을 나누어본 적이 없다. 말의 주고 받음과 별개로 대화는 아니었다. 어두운 주방 한 켠 작은 방에 홀로 중얼거리는 목소리, 꼬불거리는 하얀 머리칼, 굽은 무릎과 허리, 소할머니는 자신이 지나온 세월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내뱉고 계셨다.
어린 아이의 아침드라마는 장거리 운전 속 나누는 부모님의 대화이다. 나는 소할머니의 이야기에 이끌리고 있었다. 큰고모가 초등학생, 아빠가 어린 아이일 즈음 소할머니는 정신질환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한 번은 소할아버지 칠순 잔치 자리에서 매우 분노하셔 할아버지를 마구 때리셨다한다. 젊은 시절 소할아버지가 소할머니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는 내가 감히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어린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생애사였다. 이러쿵 저러쿵 나는 모르는 우리 집안 사정이 오간다.
나는 과연 우리 가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들은 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고 나또한 공평하게 그가 늙어가는 일을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의 펼쳐짐을 알고, 나는 그들의 펼쳐짐을 전부 알지못한다. 무지는 찜찜하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선 부모님을 알아야 하고, 부모님을 이해하려면 조부모님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핏줄로 흘러흘러 온 세계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소할머니의 어두침침한 직사각형 세계를, 그의 마법 주문같은 중얼거림을 곱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