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의 중요성

더블린라이프5

by 아뱅

거의 한달여만여 글을 쓰기 위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사실 시간적 여유는 언제나 넘쳐났지.

근데 지금 바로 지금, 일요일 교회 가기 전 바로 이 시간에 무언가를 쓰고 싶어 참을 수 없는 그 마음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오늘 교회 식사 준비가 우리 셀이어서, 각자 맡은 재료를 준비해 가야 하는데 같이 사는 우리는 스크램블 에그를 맡았다. (그 사이에 홈스테이에서 집을 옮겼는데, 교회 친구들과 함께 살게 됐다!)

72개의 계란을 까고 섞고 후라이팬을 몇 번이나 달궈가며 만든 대량의 스크램블 에그.

계란 냄새를 맡으며 시리얼 한 그릇과 머핀을 먹어치웠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짬이 나서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image_9563882281489184018225.jpg?type=w966 조용한 우리 동네


새로 이사 오게 된 동네는 굉장히 조용하다. 사람 소리보다는 집 바로 앞에 있는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만 나고(어차피 왕복 2차선도로라 시끄럽지도 않다.)

갈매기, 그냥 새 소리가 정말 가깝게 들린다.

원래는 뽀얀 흰 색이었을 거 같지만, 지금은 베이지 색인 커튼이 나부끼는 그런 거실에 지금 앉아 있다.

지금까지 숱하게 찾아 헤맨 러블리함과 아늑함은 가득한 집은 아니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그런 집이다.


KakaoTalk_20170305_112953304.jpg?type=w966 저 소파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이런 집에 앞으로 남은 더블린에서의 몇 개월을 맡겼다.

씻기 전에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스위치를 켜고 샤워를 하러 가야 되고,

설거지 할때도 뜨거운 물을 쓰려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 스위치를 켜야 하고,

가스렌지를 사용하려고 해도 가스가 나오는 스위치를 올려야 한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들을 누리기 전에 한 번 더 무언가를 거쳐야 하는 그런 아날로그 감성이 집안 곳곳에보물찾기 하듯 숨겨져 있다.

문이 뻑뻑해서 2번의 문을 지나면서 이 문이 안 열리면 집에 못 들어갈 수도 있겠구나, 하며 문이 열림에 감사해한다. 끼긱끼긱거리는 침대 매트리스와 이러다 호흡기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은 켜켜이 먼지가 쌓인 카페트가 온 집안에 깔려있는 그런 집.


IMG_2497.jpg?type=w966 비 오는 날에도 집을 보러 하루에 3-4탕씩 뛰고 했다


집을 찾기 위해 거의 2주동안 매일매일을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누구든 길거리에 나 앉은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불행의 아이콘이 내가 될 수 있으니 불안했다.

하루에 4번 뷰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한국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불닭볶음면을 끓여서 국물까지 원샷을 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그리고 드라마 같은 결말. 해피엔딩.

홈스테이 마지막 날 아침, 결국 홈스테이를 다른 집으로 옮겨 일주일 연장하기로 하고, 학교를 갔다가 집에 돌아와 짐을 쌌다. 같이 집을 알아보러 다닌 친구들이 저녁에 뷰잉이 잡혔다기에 또 한 시간을 걸려 도착한 한적하고 좋은 동네.


인상좋은 할아버지는 낯선 외국인인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줬고, 지친 그날 저녁 봤던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반짝 거리는 새 물건이 없어도 냄새에 민감한 내가 느낄 수 있는 켜켜이 쌓인 먼지 냄새가 잔뜩 나는 집이었어도 이런 큰 집에, 내가 살 수 있게 된다면 더없이 좋을 거 같았다.


wow

woooowww


우와 와우를 연발하며 집을 둘러보고나니

집주인 할아버지는 "이제부터 여기가 너희 집이야"라고 말해줬다.


R e a l l y ? ? ?


리얼리를 반복하며 숨길 수 없는 웃음을 내비쳤고, 그 다음날 바로 이사를 왔다.


?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QWM%2Fimage%2FK7b-ub0hgHGrALNpGPFfF0O0pKs 우리집 열쇠


한낱 의식주따위가 뭐라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건지 집 찾기가 너무 원망스러웠는데,

새 집에 들어온지 이제 일주일째.

달라진 마음이 의식주의 중요성을깨닫게 한다.


image_4100773511489704552961.jpg?type=w966 햇볕 잘 드는 우리집, 스윗홈


아침에 일어나 씻고 화장을 하고 시리얼을 먹고 집을 나선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각자의 직장과 학교로 떠나고

나도 그 틈에 섞여 열심히 학교로 걸어간다.

학교가 끝나면 돌아갈 곳이 있다.


강이라기엔 작은 하천이 있는 길을 따라 쭈욱 걷고 걷다보면

물에 떠있는 오리,하얀 백조는 아직도 이질감이 가득한 예쁜 풍경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필요한 것들을 파는 작고 큰 가게들을 지나 주택가에 접어들면 우리집이 나온다.



낮에는 창문이 열려있어서 하얀 레이스 커튼이 나부끼거나, 저녁에는 불이 환하게 켜있어서 반가운 우리집.

이제 안 지 고작 한 달, 이제 안 지 고작 이틀된 친구와 함께 사는 우리 집.

벌써부터 안 맞는 것도 발견했고, 서로 조심해가며 살아야 하는 부분도 많지만

지금의 생활은 앞으로의 아일랜드 생활을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같이 무얼해먹을지, 같이 어딜갈지, 같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갈지 기대되는 우리집.


image_745354101489704552965.jpg?type=w966 잘 먹고 잘 사는 중


내가 돌아갈 곳,

내가 잘 곳이 있다는

이 자체가 바로 의식주의 가장큰 이점이며, 맹점이었다.



마음이 편해지니 학교도 재밌고,

한 방을 쓰게 될 친구와 영어로 나눈 어젯밤의 대화도 멋졌다.


서로 되도 않는, 이게 대화가 될거라고 의심해 마지 않았던 단어와 구절들로 이뤄진 영어 대화는

앞으로의 설렘까지 몽땅 담겨 있었으니까.




벌써부터 아일랜드의 이 생활이 그립다.

되도록이면 이 생활을 오래오래 잘 이어 나가고, 오래오래 재밌게 놀다 가고 싶다.

이 정도면 정착 잘 한 게 아닐까.



모든 감각이 낮잠자는 한 낮에 이런 긴 글을 쓸 수 있는 집중력이 주어진 것도 나에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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