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라이프
2017.5.4
하루하루가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하는 게 많아서 오늘 하루 뭐했는지 되짚어 보면 알차게 보냈다 싶은데, 금세 저녁 10시가 넘어 있다. 아마도 9시는 돼야 조금 깜깜 해지는 탓에 하루를 더 길게 쓰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하루가 짧고 또 짧다.
요즘 학원 수업은 재밌다. 여전히 모르는 문법 문제가 나오면 버벅거리고 있지만, 엄청나게 빨리 말하는 티쳐 Nessa의 말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잘생기고 어린, 파란 눈의 독일 애기랑 눈 마주치면서 얘기하는 것도 재밌고, 티쳐가 이거 뭔지 알아? 물어봤는데 아무도 대답 못할 때. 내가 딱 나서서 대답해서 “코렉트! 그랜드!” 대답을 듣는 것도 재밌고.
이래저래 요즘은 수업 시간에 잠도 안 오고 즐겁다.
어제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학원이 끝나고 공원에 갔다.
적당히 먹을만한 걸 싸들고, 이곳 사람들의 일상에 젖어든다.
멀쩡한 벤치를 두고 햇볕이 내리쬐는, 푸르른 잔디에 앉는다. 방금 비둘기가 지나갔어도, 깃털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다. 아무도 비둘기의 깃털이나 비둘기에서 떨어질 거 같은 벌레, 세균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저 오랜만에 얼굴을 내밀어,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해의 존재에 대한 고마움만 있을 뿐.
그리고 그 시간을 즐길 뿐.
푸른 잔디에 드러누워 선탠을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뒹굴거리며 친구와 이야기하거나, 우리처럼 소박한 런치를 해결하거나.
고작 한강 잔디에나 앉아봤을 한국인들은 누가 봐도 잔디 위에서 경직된 채로 앉아있다.
릴랙스 하지 못하고 앉아있는 자세가 영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도 아직 후리 하게 드러누워 잔디를 즐기기에는 인생 27여 년을 한국에서 보내고 온 사람으로서 아직 미숙하다. 조금 더 외쿡 물을 먹고, 외쿡 마인드를 즐겨야 가능할 거 같은, 햇볕 쨍쨍한 날 잔디에 내추럴하게 드러눕기.
잔디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본다.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서 내 취향이나 서로 갖고 있던 콘텐츠에 대해서도, 여행, 성격 등 다양한 주제가 퐁퐁 샘솟아 오른다, 한낮의 잔디 위에서.
콘텐츠는 이 세상에 다양한 방식으로 무궁무진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만들어낼 수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는 엄청난 장점과 매력이 있기에 난 앞으로도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좋아할 거 같다.
잔디의 싱그러움이 잔뜩 묻은 엉덩이를 털어내고 쇼핑을 하러 가본다.
이번 주 프랑스 해변가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나기에 여름옷을 마련하려고 자라와 h&m에 들렀다. 한국에서도 좋아했던 자라는 여기에서도 스타일은 똑같지만 사람이 많은 주말에 오면 정말 시장과 다를 바가 없이 정돈이 하나도 안되어 있어서 선뜻 손이 가는 옷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오늘은 한가로운 수요일 오후. 사람도 많지 않고, 옷도 정돈된 채로 각이 잡힌 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어서 이 옷 저 옷 골라 피팅룸에서 잔뜩 입어본다.
쇼핑을 하고 익숙하게 버스를 타러 간다. 이제 집 앞에 오는 하나의 버스만 기다리는 융통성 없는 길치는 아니다. 집 근처에 가는 아무 버스나 우선 타고 본다. 목적지도 라. 스. 마. 인 한국어 발음 그대로 발음하지 않고, 랏.마인 이라고 흘려 말해도 약간 무서워 보이는 아이리쉬 버스 기사는 철석같이 알아듣는다.
버스 2층으로 올라가 다시 햇볕을 즐기며 창문 밖을 바라본다. 오늘 새삼스럽게 이곳에 와서 음악을 자주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서울에서 매일 아침 지하철 통근 시간을 함께한 음악을 버리고 난 무엇과 함께 아일랜드 길 위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나, 생각해보니 고작 해봐야 영어 컨버세이션 팟 캐스트 정도가 다다. 혹은 오기 전 다운로드하여 온 음악 몇 개 정도.
내 생활에서 꽤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음악이, 지금 이곳에서 무엇으로 대체되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점에, 내가 여기 온 지 딱 3달이 됐다는 걸 깨달았다.(어딘가로 이동하면서 나는 이렇게 이런저런 생각 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나 보다. 음악 없이.)
익숙한 친구들, 익숙한 길, 익숙한 학교, 익숙한 테스코 점원.
이제 일상에 낯선 것보다 익숙한 것들이 많아진 요즘.
이제 그만, 더 즐겨도 되고, 더 릴랙스 해도 되는데 몸과 마음의 무거움은 역동적인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내 마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또 실망. 그래서 또 좌절.
이 낮은 자존감을 받아들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살아도 좋을 텐데..
프랑스 남부 해변의 해와 바람, 바다가
그리고 얇은 옷가지들이
내 마음의 무거운 짐, 한국에서부터 지켜온 굳세지만 작은 자존심과 낮은 자존감으로 꽁꽁 얼어붙어있는
내 마음마저도 스르륵 녹여줬으면 좋겠다.
기대되는 프랑스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