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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뱅 May 01. 2024

모두가 동등한 곳

꽃집을 운영한다면 매주 몇 번은 가야 하는 필수 장소.

바로 꽃시장이다.

서울에서만 꽃을 배워서 다른 지역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큰 도시에는 시장이 있다고 알고는 있다. 서울에서는 고속터미널 경부선 3층, 양재 꽃시장이 있는데 처음 꽃을 배웠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고속터미널로 꽃을 사러 간다.


월, 수, 금요일이 되는 저녁에 새 꽃이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꽃을 사러 가는 아침 시간에도 시장은 굉장히 붐비고 정신이 없다. 특히 전국의 모든 꽃집의 극성수기인 5월 시즌을 앞둔 오늘이라면. 


오픈한 지 3주도 안돼서 대목이라는 시즌을 맞았는데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꽃 스승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샘플을 만들기 위해 꽃을 사고, 만들어서, 사진을 찍고, 인스타에 올려서 열심히 홍보하기. 아직 꽃집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에 나의 미약한 홍보가 몇 명에게 닿아서 다행히 카네이션 바구니는 만들 수 있는 주문량을 보유 중이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예약받은 바구니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 오늘은 미리 꽃을 사러 출동.


지하철에서 내려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꽃시장이 있는 경부선 3층으로 올라갈 때의 마음은 나의 작업실이 생기고 나니 과장 조금 보태서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 든다. 1층에서부터 나던 꽃 향기가 점점 짙어지고,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소리도 가까워진다. 꽃시장은 여전히 현금거래 기반이라 미리 돈을 인출하면 총알 장전 완료. 출동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꽃시장은 생각보다 그리 크진 않다. 정확한 점포 개수를 모르겠는데 아마 100개는 넘으려나..? 몇 번 가다 보면 어느 정도 알만한 수준. 가늠이 안될 정도는 아니다. 전에도 개인 포트폴리오 작업을 하느라 시장을 자주 왔기 때문에 어디에 가면 뭐가 있는지 대충 알고는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꽃을 사러 오니 이 가게에서 샀던 거베라가 좋았던 기억으로 그 가게를 또 가고, 저 가게에서 샀던 소재가 상태가 엉망진창이었으니 절대 안 가야지.. 이런 나름의 데이터 베이스가 쌓이는 중이다.


오늘 아침에는 시즌을 앞두고 굉장히 사람도 많고 정신이 없는 시장을 지나치다가 과거 잠깐 일했던 대형 꽃집의 직원분과 대표님을 만났다.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 시간대에 꽃을 사러 오시는 걸 알고 있었는데 3주 만에 처음 만나게 되었네. 생각보다 반가워서 알은체를 했는데 두 분 다 "플라워 일" 하냐고 물어보셨다. "네" 

구구절절 긴 얘기는 안 하고 일은 하고 있다고 했고, 종종 뵐 거 같으니 또 뵙자며 헤어지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좁은 통로에서 시장의 그 어느 꽃보다 빛나는 밝은 오렌지 색 옷을 입은 대표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국내 내로라하는 거대한 웨딩홀, 비싼 청담에 멋진 샵을 운영하고 있는 꽃 경력 20년이 넘은 대표님도 오픈 3주 차 새내기 꽃집 사장과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이 꽃을 사는 것이다. 이보다 공평할 수가 있나. 물론 가게 사장님에게 뭘 따지거나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는 등의 포스는 뉴비가 따라 할 수 없지만 동일한 조건에서 같은 가격으로, 비싼 꽃다발을 만들고 부케는 만드는 분과 같은 재료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언제 인스타 팔로워 수를 늘리나, 언제쯤 주문이 많이 들어올까, 언제 더 큰 공간으로 갈 수 있을까. 아직 멀은 길을 조급해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황량한 땅에서 혼자 쓸쓸하게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꽃을 한 지 몇 십 년이 된 사람도 나와 같은 시간대에 같은 환경에서 꽃을 사고 있다는 사실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이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그녀는 멋지고 성공한 오너가 되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희망도. 잠깐 겪은 대표님을 잘 모르지만 누가 봐도 꽃을 하는 사람답게 아름답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다. 나도 한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하면 저런 포스를 가질 수 있게 될지 궁금해졌다.


모두가 공평한 곳

그곳은 꽃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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