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집에 가지 말까요…?
꽃보다 그녀-12
“지영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뜬금없는 질문에 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분위기 좋은데 무슨 얘기하려고?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래서, 나 어떻게 자빠뜨릴 거예요?”
지영은 이게 뭔 소린가 하다가 술이 번쩍 깨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붉은 얼굴에 작은 진주 귀걸이가 더 하얗게 보인다.
“그, 그것도 들으셨어요?…”
“들으려고 한건 아닌데 혜선이라는 친구분 목소리가 꽤 우렁차더라고요. 그리고 지영 씨가 하는 대답에서도 여러 가지 정보가 있었고…”
지영은 너무 창피하고 당황스럽다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한국사람이라고 티를 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큰 수난을 안 당할 텐데! 와인잔을 잡아 크게 두 모금을 마시니 바닥이 났다.
백현은 그녀의 얼굴이 새침하다가 나른하다가 빠르게 변하는 것을 보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분해서 살짝 볼 위로 내려온 옆머리도 귀 뒤로 넘겨주고 뾰족한 눈매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보고 싶다.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위험해.
“나 술 되게 세요. 지영 씨, 나 어떻게 자빠뜨릴 거예요?”
백현은 쐐기를 박듯이 한 번 더 재차 묻는다. 지영은 우물쭈물거리며 빈 와인잔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술이 다 깬 거 같은데 와인 말고 아저씨 드시는 거랑 같은 거 주문하면 안 돼요…?”
큭, 귀여워도 너무 귀엽다. 내가 꽤 곤란한 질문을 했나 보지? 그래. 한 발자국 물러설 여유를 줘야지. 백현은 같은 위스키로 온 더 락을 주문했다. 정사각형 투명한 얼음이 담긴 글라스에 투명한 갈색 액체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하얀 손가락이 글라스를 쥐고 작은 입가로 액체를 기울인다. 백현은 왠지 아이에게 독한 술을 쥐어준 거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한 잔이니까. 지영은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셔보고는 목이 타는 듯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백현은 그녀의 입술을 지켜보다 물 잔을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사실 혜선이가 아저씨 술을 엄청 먹여서 자빠뜨리라고 했는데 아저씨 술이 엄-청 세시다니 안 되겠네요.”
지영은 꽤 쿨하게 얘기하며 물을 얼른 마셨다. 혜선이란 친구는 몸이 달았는데 나비 아가씨는 그 정도는 아니군. 괜히 술이 세다고 얘기했나. 지영은 마음이 편해진 건지 방긋 웃으며 한 모금 더 마신다. 백현은 그녀에게 너무 독한 술을 시켜줬나 걱정이 되다가도 술을 얼마나 마시나 지켜보고 싶기도 했다. 백현은 디너 테이블을 물리고 디저트 메뉴를 그녀에게 건넸다. 위스키를 마시고 몽롱한 표정을 하던 그녀의 표정이 팍-하고 갑자기 들어온 전구처럼 밝아지는 것을 보며 백현은 웃음을 터트린다.
“음. 크림 뷔릴레 하고 초콜릿 무스 너무 맛있을 거 같아요. 근데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은데…”
어린 여성은 디저트로 만족시키는 법이지. 백현은 웃으며 말했다.
“생일이잖아요.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지영은 고민하다 크림 뷔릴레와 초콜릿 무스를, 백현은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디저트가 나오자 백현은 아이스크림을 지영에게 내밀었다.
“이거 아저씨 거 아니에요..?”
“먹고 싶은 데 탈락시킨 거 같길래. 어서 먹어요. 생일 축하해요!”
레스토랑에 미리 말해둔 덕분에 멋진 필기체로 Happy Birthday라고 쓰인 앙증맞은 초콜릿 무스를 앞에 두고 지영은 정말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기쁘게 생일을 보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 순간이 정말 뿌듯하고 즐거웠다.
“아저씨, 오늘 정말 감사해요. 저 많이 망설였는데 오늘 아저씨하고 나오길 잘한 거 같아요. 혜선이는 행동파라 저 오늘 술 마시러 나가는 거 되게 겁났었거든요? 근데 지금 되게 행복해요.”
백현은 앞에 놓인 디저트를 열심히 먹는 지영을 보며 난생처음 여성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졌다. 순수하게 즐거운 순간을 만끽하고 감사하는 모습은 어쩐지 감동스럽기도 했다. 매주 그녀를 불러서 좋은 데서 먹여야겠다,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디저트를 야무지게 먹은 지영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집에 가기 싫어요.”
백현은 그녀의 눈을 곧바로 바라봤다.
”저 집에 가지 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