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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Aug 13. 2020

누구 탓인가

가족관계


사춘기가 최고조에 이른 열여섯 큰 아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열 두 살 둘째, 사춘기 형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여섯 살 막내. 럭다운 이후 6개월째 ‘오늘도 무사히!’를 외치며 이 아이들과 종일 함께 하고 있다.


보이지 않으면 서로 찾으면서도 함께 있으면 정글이 따로 없다. 나는 서로 으르렁대는 어린 사자들을 압도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암사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눈에 힘만 한 번 주어도 평정되던 시대는 갔다. 그저 분위기 파악하면서 조용히 어르고 달래는 수밖에.....


요즘 큰 아이에게는 다이어트가 인생 최대 목표다. 두 달 만에 20킬로그램을 감량하고 그 몸무게를 유지하느라 식단 관리와 운동 시간에 철저하다. 즉 큰 아이가 운동 중일 때는 아무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는 질풍노도 사춘기를 앓고 있는 큰 아이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이번 여름을 보내는게 최대 과제이다.


요즘 런던은 폭염으로 얼굴은 달아오르고 몸과 마음은 녹아내린다. 보통 이곳의 여름 평균 기온은 20~25도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 주택에는 에어컨도 없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한낮에는 34~36도까지 올라가고 있으니 창문을 열어 놓고 마당에 물을 뿌려도 더위가 식지 않는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를 하고 홈메이드 비타민 워터나 아이스 레모에이드를 찾는다.


큰 아이는 이 더위에도 근력 운동을 하고 있다. 나는 폭염에 기운이 다해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막내가 다가와 '엄마! 이렇게 더울 때는 레몬에이드 한 잔 또 해주셔야죠?” 오늘만 세번째이다. 항상 예쁘게 말하고 엄마의 기분을 살피는 아이지만 지금은 때를 잘 못 선택했다. 아침부터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지쳐 이제 자리에 앉은 나다.


마침 부엌에서 서성이는 남편이 보인다. 막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한테 얘기해봐~". 막둥이 부탁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주는 아빠이기에 아이는 쪼르르 달려간다. 하지만 들여오는 소리는 "예신아! 이리 좀 와봐~"


앗! 이건 아니다. 지금 큰 아이는 운동 중이다. 이때만큼은 아무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빠 목소리는 이미 아이 귀에 도달했다. 한숨 소리와 함께 '네!' 하고는 몸을 일으킨다. 이를 악물고 몸을 지탱하고 있던 두 팔에 근육이 불끈 쏟아있다.


‘나는 지금 운동 중이었다고!'. 냉장고를 열고 빨간 뚜껑이 달린 유리병을 조심스레 꺼낸다. '아니, 내가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유리병 안에는 며칠 전 꿀에 재워둔 레몬청이 얌전히 숨죽이고 있다. '제발, 운동할 때만은 말도 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무 찬장에서 유리컵을 꺼낸다. '윤예준은 왜 지금 이걸 마셔야 하냐고!'. 앙증맞게 반짝이는 실버 스푼을 꺼내 레몬청을 담고 탄산수를 붓는다. '앞으로는 자기가 만들지 못하면 먹지도 말아야 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동동 띄운다.


궁시렁거리면서도 조신하게 레몬에이드를 만들고 있는 덩치 큰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난다.


‘아니! 우리 집 식구들은 왜 항상 모든 걸 나한테만 시키냐고!'. 잘 씻어 말려둔 민트 이파리를 뛰우고 빨대까지 꼽아 막내에게 무심한 손길로 건네준다. '윤예준! 너는 오늘 이게 마지막이야!' 숨죽이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막내의 동그란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 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모두가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한다.  


막내: 난 형이 만들어 준건 이제 절대 안 먹어!


둘째: 형도 항상 엄마가 만들어 준 거 먹잖아! 그럼 이제 먹지 마!


남편: 아니, 지금 그거 아빠한테 하는 말이야? 만들지 못하면 먹지도 말라고?


첫째: 제가 아빠한테 말한 게 아니잖아요! 저는 절대 그런 불효자가 아니라구요!


다 내 탓이다. 막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레몬 에이드를 열 잔이고 백 잔이고 만들었어야 했다. 일단 이 상황의 불씨를 꺼야 한다.


얼른 달려가 두 팔 벌려 막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음 타깃을 정했다. 이 상황과 전혀 관련 없는 둘째에게 말했다. “예성~ 흙탕물 알지?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한마디라도 더하는 건 흙탕물을 계속 휘젓는 거야.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물은 맑아지거든! 우린 가만히 있자.”, “엄마! 머드? 그거 좋은거 아니에요? 얼굴에 바르는 거?” 할 말이 없다. 그래도 큰 아이는 알아들었나 보다. '윤예성은 에비앙이 되어야 하는데 템즈 강물 같은 소리만 헤대는군!'  


그 사이 남편은 어이가 없는지 멋쩍었는지 위층으로 올라간다. 막내는 형들 하는 소리가 우스웠는지 미소를 지으며 절대 먹지 않겠다던 레몬에이드 잔을 홀짝이고 있다.


오늘은 순전히 더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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