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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Oct 13. 2020

공정사회와 올바른 가르침의 자세

영국 교육






막내는 영국 초등학교 1학년이다. 집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한다. 아이에게 영어는 제2외국어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고 수업도 따라 가지만 여전히 '엄마의 언어'가 아니다. 가끔 언어 사용의 불완전성에 대해 편치 않은 마음을 드러낸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왜 내가 영어를 해야 해!?'. ‘내가 영어만 못하는 거지. 한국말로는 뭐든 다 말할 수 있다고!'.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아이는 영국 오기 전까지 유치원에서 러시아어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영어를 한다. 그런데 또 다른 새로운 언어를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프랑스어다. 아이에게는 제4 외국어다.


어려서부터 말하기를 좋아했던 아이는 궁금한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넘쳐난다. 학교에서는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니 그 답답함이 이해된다. 프랑스어를 배운다고 했을 때 아이 어깨 위 또 다른 짐이 될까 안쓰러웠다.

프랑스어 수업이 시작되고 몇 주가 지나도 '나는 한국 사람인데 왜 내가 프랑스어를 배워야 해!?' 같은 불평이 없다. 오히려 프랑스어 수업이 있는 날에는 집에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엄마! 프랑스어로 하나, 둘, 셋, 넷이 뭔 줄 알아요?' 그리고는 바로 ' Un, Deux, Troi, Quatre!'를 외친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어느 날은 거실에서 방에서 아이의 소리가 들린다.  '엥, 듀, 트로아, 까뜨르~, 엥, 듀, 트로아, 까뜨르~'. 프렌치의 세계를 즐기는 아이를 나도 따라 해 본다. '엥, 듀, 트로아, 까뜨르~.' 고작 '하나, 둘, 셋, 넷'으로 무슨 언어적 유희를 맛보겠냐만 그래도 재미있다.

아이는 프랑스어를 즐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우고 나서는 '열 하나, 열둘'을 예습해 갔다. 짐작하기로는 프렌치의 재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어는 모든 아이들에게 '엄마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프렌치 앞에서 아이는 친구들과 평등했다. 아이가 모르는 '에스카르고, 푸아그라, 미장센, 데자뷔'는 다른 아이들도 몰랐으니까......



<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 오는 길 >



며칠 전 아이와 잠자리에 누웠다, 잠이 들 때까지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궁금한 것을 물어대는 통에 취침 시간이 항상 늦어진다.  그런데 웬일인지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말이 마음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예준아, 엄마한테 할 말 없어?', '아니......', '그래? 엄마는 예준이 마음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정말?'. '응, 예준이 마음이 뭔가 할 말이 있나 봐~'

 '.........' 아이는 한동안 말이 없다.

힘없는 목소리로 마음을 꺼낸다. '오늘 프렌치 시간에 게임을 했어....' , '그래? 어떤 게임?', '친구랑 짝을 지어서 서로 단어 맞추는...', '그런데?', '선생님이 리사랑 나를 짝으로 했어. ', '예준이 리사랑 베프쟎아~. 재미있었겠다!"


아이의 목소리에 서러움이 실린다. '선생님 나빠!' , ‘왜?’, ‘내가 어떻게 리사를 이길 수 있겠냐고?', ‘왜?’,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리사를 이길 순 없다고!'. ‘왜 못 이겨?’ , ‘리사 엄마는 프랑스 사람이란 말이야!’ 아이의 마음이 울먹인다. '이건 언페어(Unfair)야! 난 이제 프렌치 싫어! 리사도 싫어! 프렌치 더 이상 안 배울 거야!', '이제 학교도 안가'.

내 품에 안기더니 어깨를 들썩거린다. 하루 종일 갇혀있던 아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내 마음도 요동친다. ‘아니, 선생님이 생각이 있는 거야? 어떻게 아이한테 이런 상처를 줘! 당장 내일 학교에 가서 따져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기본적인 배려도 없는 거야. 예준이가 아이들이랑 한국어 단어 퀴즈 하면 그게 말이 돼? 아이들이 좋겠냐고?'......라고 생각했으나 말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마음에 가둬 두었다.

내가 '세드 엔딩(Sad Ending)'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유가 있다. 공감 능력의 화신인 나는 어느새 주인공이 된다. 몇 날 며칠 분하고, 슬프고, 억울하고, 절망에 빠진다. 지나친 감정이입은 건강에 해롭다. 나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세드 앤딩'은 없다.

 '와~ 예준아! 네가 프렌치를 정말 잘하나 보다. 아마 리사를 상대할 사람이 예준이 밖에 없었나 봐. 그래서 리사(Lisa)랑 짝을 주신 거 같은데...?.'  살짝 아이를 살핀다. '역시 예준이가 프렌치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더니. 엄마는 그럴 줄 알았어!'

아이는 말이 없다. '우리 예준이는 정말 대단해. 엄마를 닮았나 봐~.' 아이의 깊은 심호흡이 들린다. '그렇잖아도 선생님이 나보고 어메이징 하다고는 했어. 내가 지긴 했지만 리사를 상대로 이 정도라면 대단한 거라고.......'

휴우... 하마터면 몇 날 며칠 학교 안 가겠다는 아이와 씨름할 뻔했다. 아무튼 선생님은 공정하지 못했다. 아니다. 그렇다고 리사가 짝이 없어야 하는 것도 공정한 것은 아니다. 억울함과 슬픔을 담았던 아이의 말과 마음은 어느새 꿈나라로 떠나버렸다. 이제 나에게 물음만 남았다.


‘공정 사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올바른 가르침의 자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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