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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JiYou Jul 19. 2021

거지와 소녀

성냥팔이 소녀와 늙은 노숙자 이야기

연말연시가 가까워지면 가장 괴로운 것은 추위이다. 배고픔이나 외로움보다 더 힘든 것이 이 계절의 춥고 스산한 날씨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에서 가족들과 친지들과 모여 몸과 마음을 덥히지만, 길거리를 떠돌며 잠자리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매서운 추위가 지금의 처지를 더욱더 비참하게 만든다.


가끔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주거나 먹을 것을 곁에 두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평소보다 화려하게 장식한 축제의 시기에 노숙자가 모아간 더러운 자투리 동전들을 기쁘게 받을 상점은 어디에도 없어 문전박대당하기가 일수고, 추운 겨울 길거리에 놓아둔 음식은 가뜩이나 낮은 체온의 몸뚱이를 데워 주기는커녕 오히려 삼키기도 전에 입안에서 침과 함께 얼어버린다.


그래도 그런 호의에 불만을 품거나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그 모든 호의에 시큰둥할 뿐. 이 시기가 지나면 또다시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한 해의 마지막 날. 모두 넘치는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하는 명절. 그래서 간혹 이 시기에만은 특별히 신경을 써주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 또한 그때뿐이었다. 이 기간에 유독 정을 베풀던 사람들도 두 번 이상은 찾아오지 않았다. 또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시기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온기를 나누는 것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을 보살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구걸하거나 잠을 자거나 성냥을 팔거나 하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마치 투명 인간을 대하듯 지나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 벤치 뒤편 구석진 벽 한 귀퉁이에서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추위와 맞서고 있었다.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벽과 같은 색의 옷과 뿌연 머리카락과 때 묻은 얼굴 덕에 신경을 써서 잘 보지 않으면 내가 벽인지 사람인지 아무도 분간할 수가 없을 터였다. 나무 벤치 위에 누우면 차디찬 벽에 기대어 있는 것보다는 덜 춥겠지만, 간혹 거리를 순찰하는 경찰들이 다가와 귀찮게 하므로 사람들이 잠든 새벽 시간을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기어 올라가고 동이 트면 다시 그 자리를 비워둔다. 아무도 앉지 않아도,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저기 저 조그마한 계집아이... 양말은커녕 신발도 없이 맨발인 한 여자아이가 건너편 길목에 주저앉아 팔려고 가져온 것 같은 성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내가 처음 길거리에서 지낼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저 아이만 했던 나의 아들이 지금은 벌써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나이가 훌쩍 지나있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쯤이라면 저만한 딸아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한참 동안 잊고 있던 설움이 밀려들었다. 젠장.. 이런 시간에 따뜻한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지 않고 저렇게 맨발로 나와 성냥을 팔고 있다니... 무슨 사연으로 이런 추위에 길거리에 나와 있는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허공에 대고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어 보았다.


소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내 처지도 만만치 않은 주제에 딱하다는 마음이 일었다. 어느새 눈까지 포슬포슬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 건너에서 낯선 늙은이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도 모른 체, 그 작은 아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냥들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소녀는 더이상 성냥을 사달라고 외치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하긴, 사람들은 그 소녀의 작고 떨리는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마치 그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옹크린 작은 소녀가 그들의 시야에서는 너무 낮게 자리잡아 눈에 띄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나에게는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그 소녀의 작은 체구가 선명히 보였다. 나와 꼭 같은 모습으로 벽에 바짝 붙어 추위와 맞서는 모습이 너무나 똑똑하게 보였다.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망설이던 소녀는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없어 보였다. 누군가가 기다리는 집이 없거나 혹은 누군가가 소녀가 가져다줄 돈을 기다리고 있는데 성냥을 하나도 팔지 못했으니 후환이 두려워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슬픈 일이었다. 먹먹한 마음이 들어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는 소녀를 계속 주시했다. 그런데 잠시 뒤 별안간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소녀가 성냥을 상자 귀퉁이에 그어 불꽃을 일으켜 낸 것이다. 순간 나의 눈을 의심할 만큼 커다랗고 동그란 빛이 그 작은 성냥 주위로 아니, 소녀의 주위로 밝혀졌다. 이제 사람들의 발걸음도 다 끊기고 깊은 밤이 오는 중이었다.


동그란 불빛은 그냥 예사로운 불빛이 아니었다. 그 불빛이 별안간 귀퉁이를 떼어내 또 다른 불빛을 만들어냈다. 떼어낸 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두 개의 동그란 불꽃이 되어 그중 하나가 바로 내 눈앞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불꽃 속에서 따뜻해 보이는 어떤 집을 보았다.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내가 마치 그 집 안에 있는 것처럼 온기마저 느껴졌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곳은 바로, 나의 집이었다. 내가 떠나오기 전 행복하고 따뜻했던 내 집이었다. 내 아내와 내 아들이 있던 바로 그곳!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바로 그 집이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식탁보가 가지런히 깔린 동그란 식탁 한가운데엔 멋진 장식 초가 불타고 있었고, 그 주위로 맛있는 음식들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손을 뻗어 따뜻해 보이는 그 음식들을 만져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크고 따뜻했던 불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까까지 내리고 있던 눈도 멈추고 습한 추위와 스산한 바람만이 남겨져 있었다. 건너편의 소녀를 바라보니 망연자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믿기 힘들었지만 아무래도 작은 성냥이 마법을 부린 것 같았다. 성냥이 다 타버리자 꺼져버린 불빛이 자기가 부린 마법 같은 세상도 함께 데려간 것 같았다. 나는 소녀에게 재촉하듯 온 마음을 다해 눈길을 보냈다. '자, 어서! 다음 성냥에 불을 붙여다오!'


두 번째로 성냥을 꺼내든 소녀는 아까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 불을 붙이니 아까보다 더욱더 커다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빛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귀퉁이를 뚝 떼어 또 한번 나에게로 보내주었다. 이제 또다시 길 건너편 소녀와 나에게 동그란 불빛이 각각 하나씩 밝혀졌다.


불빛 속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수많은 장식이 달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선물들이 가득했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인 듯했다. 문득 따뜻하게 옷깃을 여며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가와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가 어린 시절 내내 가지고 싶었던 연이 선물상자들 틈 사이로 삐죽이 보였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내 형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만들고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나 몰래 그 자리에 놓아둔 것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사랑스럽던 선물을 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불꽃은 이미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점점 뿌옇게 변하는 시야를 원망하며 조금이라도 그 광경을 더 오래 보려고 눈을 비벼대고 끔뻑댔다. 그러면서도 뻗은 팔은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팔은 점점 사라져가는 불빛을 향해 있었다. 순간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려있던 촛불 장식 하나가 불빛을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곧 동그란 성냥의 불빛이 꺼지고 다시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늘 위의 촛불 장식은 작고 여린 빛을 내며 가만히 떠 있었다. 마치 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별이 된 촛불 장식은 몇 번이고 깜박거리더니 이윽고 아래로 향하여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소녀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도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그 별이 된 촛불 장식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생명도 함께 꺼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건너편의 소녀도 손으로 연신 제 얼굴을 닦는 것을 보니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당장 달려가 소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렀던 탓인지 온몸이 추위로 굳어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소녀가 다시 한번 성냥을 켜주길 바라며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벌어진 입으로 나오는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와 하얀 입김만이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어우러져 피어오를 뿐이었다.



마침내 소녀는 세 번째 성냥에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결심한 듯 가지고 있던 모든 성냥에 불을 붙였다. 바닥에 쌓인 그 성냥 뭉치들은 마치 벽난로가 피어오르듯 활활 타오르며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빛을 우리에게 나누어 밝혀주었다.


그곳엔 나의 어머니가 있었다. 병으로 돌아가시기 전 그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어머니..!"

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또다시 거친 숨소리와 허무한 입김만 허공으로 뻗어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소리 없는 그 외침을 어머니가 들은 듯 나를 향해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어, 어머니! 이제 그만.. 나를 데려가 주세요, 어머니..."

순간 몸이 가벼워지며 하늘로 붕 뜨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나는 어느새 하늘 위 아까 그 촛불 장식이 빛나던 그 자리에 떠올라 있었다. 내 옆에는 어머니와 길 건너 그 작은 여자아이, 그리고 또 한 분의 너그러워 보이는 한 노부인이 함께 두둥실 떠 있었다. 우리는 마침내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힘을 들이지 않고도 몸이 잘 움직이고 가벼웠다. 나의 목소리는 이제 더는 목구멍에 걸리지 않았고 나는 소녀를 향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고맙다 얘야. 네 덕분에 나는 마침내 무척 행복했단다. 이제 우리 추위가 없는 곳에서 편안하게 쉬자꾸나."






다음 날 아침,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얼어 죽은 한 소녀를 발견했다.

"아니, 이런 곳에 웬 여자아이가...."

"성냥으로 몸을 녹이려 했나 봐요... 가엾어라..."

그리고 건너편에서도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한 노인이 쓰러져 있어요!"

"이 사람 주위에도 성냥개비가 있는데요?"

"성냥팔이 소녀가 나눠주었나..?"

"아무튼 두 사람 다 참 안됐네요.. 고작 이 작은 성냥개비로 추위를 피하려 했다니..."



사람들은 몰랐다. 지난밤 나와 소녀가 얼마나 크고 밝으며 따뜻한 불꽃을 쬐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성냥들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이 바로 천국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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