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우연처럼 스며든 문장

드라마 한 장면이 건넨 위로

by 김지윤

TV를 켜둔 건, 생각을 멈추고 싶어서였다. 무슨 채널인지, 무슨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배경처럼 흘러가는 소리에 나를 기대고 싶었던 밤이었다. 눈을 감아도 마음은 시끄러웠고, 숨은 쉬고 있었지만 사는 건 아닌 것 같았던 밤. 어두운 방 안, 벽에 부딪히듯이 맴돌던 내 생각을 멈추게 해 준 건, 의외로 아주 조용하고 단순한 한 문장이었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 드라마 미지의 서울


어딘가 공허한 분위기의 장면에서, 배우가 조용히 읊조렸다. 뭔가 굉장한 대사라기보다, 평범한 듯 흘러갈 수 있는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을 잡아챘다. 나도 모르게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높였다. 드라마 제목은 미지의 서울. 그 안에서 ‘미지’는 달리기를 잘하던 유망주였지만, 경기 중 다리를 크게 다치며 선수 생활을 접게 된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런 미지에게 유일한 위로는 할머니였다. 미지는 매일 방 안에서 작은 움직임들을 반복하며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감각을 되살린다. 그러다 어느 날, 주방에서 쓰러진 할머니를 방문 너머로 발견하지만, 한참 동안 문턱을 넘지 못한다. 마침내 큰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갔지만, 할머니는 예전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날 이후 미지는 더 이상 방문을 닫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 방문을 열기 전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드라마 속 이 말이, 문장처럼 내 마음을 툭 건드렸다. 그 말 한 줄이, 과거의 나를 다시 꺼내왔다. 한때, 나도 미지처럼 방 안에 머무르던 시기가 있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쩌면 지치고, 무기력하고, 그저 하루가 너무 버거워져서 자연스레 안쪽으로 파고든 시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눈을 감던 날들. 아무리 자도 개운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피곤했던 그때. ‘괜찮다’는 말이 아무 힘도 없고, ‘힘내’라는 말이 왠지 화나는 시기.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바닥이 어딘지도 모르겠는 감정 속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며 버텼다. 미래를 상상하는 게 무서웠고, 어제를 떠올리면 자꾸만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버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미워하고, 조금씩 무너지는 마음을 방치한 채로. 그런데 ‘오늘은 아직 모른다’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아직 모른다는 것. 그건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무언가를 바꾸려 애쓰진 않았다. 다만 매일 아침, 그 문장을 조용히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오늘은 아직 모른다’는 그 말 하나로, 나는 나에게 조금의 여지를 주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망쳐도 괜찮다고. 그리고 혹시라도, 아주 작게나마 괜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그 말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다시 내게 안겨준 문장이었다.


무언가를 시작할 용기가 없던 나에게 ‘시작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오늘을 통과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 문장을 마음에 품고 나서부터, 아주 사소한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분이 괜찮은 날은 잠깐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좋아하던 카페에 들러 책을 펼쳐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지만, 그날도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오늘을 살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지나, 지금은 조금 다르게 숨 쉬고 있다.


여전히 불안하고, 때로는 멍해지는 날도 있지만, 이젠 그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은 아직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유로 하루를 견딘다.

누군가는 이직을 고민하고,
누군가는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누군가는 아무 이유 없이 삶이 버겁다고 느낀다.
그 감정들은 누가 더 크고 작고를 따질 수 없다. 그저 그 순간, 나에게 너무 벅찼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문장을 떠올린다.


조금 힘들어도 괜찮다고, 모든 게 흐릿해 보여도 괜찮다고. 왜냐하면 오늘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누군가 내 글을 읽다가 이 문장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도 나처럼 아주 작고 조용한 위로가 스며들길 바란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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