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내 옆을 지켜주던 이의 한마디
차곡차곡 써 내려가던 글이 멈춘 날. 펜을 들어도 문장은 나오지 않았고, 키보드 앞에 앉아도 손끝은 멍하니 붕 떠있었다. 억지로 한 줄 적으면 그마저도 허공에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감정도, 어떤 말도 나를 지나 타인을 향해 가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 시기를 나는 '고요한 혼란'이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글을 쓰는 게 힘들다는 말조차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겪는 이 감정들이 너무 사소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몇 날 며칠을 아무 글도 쓰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글을 쓰기 위해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하지만 손가락은 갈 곳을 잃었고, 결국 노트북을 덮은 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힘들었다. 분명 평생을 해도 지루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대로 빛을 보지도 못한 나의 꿈이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신나게 근황토크를 시작했지만, 반가움과 동시에 마음 한편은 시렸다.
늘 말이 적고,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도 드물었던 친구였다. 내가 고민을 털어놔도 "음"이라든지 "그랬구나."정도의 짧은 반응만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 친구와의 대화는 남들과는 다르게 형식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서로에게 기대지만 그렇다고큰 위로도 바라지 않는 사이. 그런데 그날,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친구가 말했다. "너 요즘 글 잘 안 써지지?". 나는 토끼눈을 하고 쳐다보며, 고객을 끄덕였다.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묻지 않아도 아는 사람처럼, 그냥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로 가볍게 툭하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응, 좀 그래. 아무리 써도 내가 쓴 글이 아닌 거 같아. 낯설어.". 그때 친구가 잠시 침묵하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너의 마음이 새겨져 있는 글을 써
순간, 눈물이 났다. 그의 말은 무게감이 없었다. 감정이 넘치는 어투도 아니었다. 담백하고 조용했다. 그런데 그 문장이 나를 툭 건드렸다.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 안에 조용히 숨겨둔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글이 언제부터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을까. 친구의 말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그동안 글을 쓰면서 점점 어떤 '형태'를 지대하게 되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어야 하고, 감동을 줘야 하고, 글로써 '무언가'를 완성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쓰다 보니, 내 안의 마음은 점점 멀어졌다. 글은 문장이었지만, 마음은 없었다. 가장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나의 감정을, 나의 하루를, 나의 조용한 마음을 꺼내 놓는 일이었다. 잘 쓰고 못 쓰는 게 중요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반응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쓰고 싶어서, 아니면 쓰지 않으면 날 것의 무언가로부터 쫓길 거 같았기에 적어 내려갔던 날들. 하지만 글이 읽히고, 반응이 생기고, 칭찬과 피드백이 오가면서부터, 나는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조금씩 사로잡혔다. 그리고 어느새 내 마음은 지워진 채, 틀에 맞춘 문장만 남아 있었다. 친구는 그걸 정면으로 짚어줬다. 결국 글이라는 건, 마음을 담아야 비로소 '나의 것'이 되는 거니까.
생각해 보면, 내게 오래 남는 문장들도 그랬다. 정제되지 않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글. 서툴어 보이지만 마음이 가득 담긴 문장.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이유 없이 울었던 날이 있었다. 별다른 사건도, 특별한 문장도 아니었는데,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나를 흔들었다. 말하자면 글이 아니라, 마음이 말을 건 것 같았다. 그건 기술이나 구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문장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에 오래 남고, 다시 떠올려지고, 누군가의 삶에 조용히 스며든다. 나는 왜 잊고 있었을까. 내 마음이 빠진 문장은, 내 글이 아니다. 그래서 갈 길을 잃었던 거다. 내가 느끼는 것, 지나온 마음, 잊히지 않는 장면과 감정... 그런 것들이 묻어난 글이 내 글이 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다시 꺼내보기 위해 무리해서 멋진 문장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하루 동안 가장 오래 머물렀던 감정, 마음에 오래 맴도는 장면 하나를 골라 조용히 써내려 갔다. 불안, 외로움, 서운함, 기쁨, 고마움. 아주 사소한 감정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내가 있었다. 글을 쓰면서 문장이 흐트러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생각이 흔들리는 것도,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가는 것도 괜찮았다. 거짓 없이, 숨기지 않고, 마음을 있는 그대로 써보려 했다. 그렇게 쓰인 글은 짧았지만, 이상하게도 다 쓰고 나면 내 안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글을 썼다는 만족감이 아니라, 나를 솔직하게 마주했다는 안도감이었다.
슬럼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이 변하듯, 글쓰기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왜'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그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친구의 말 한마디가 내게 오래 남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거창한 조언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잊고 있던 '마음'을 조용히 꺼낼 수 있게 도와줬을 뿐이다. 방향을 제시해 준 것도 아니었다. 길을 일은 내게 '시작점'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었다. 글쓰기는 결국,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을 꺼내서 문장으로 옮겨놓는 일이 글을 쓰는 거라는 것을.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문장이 되고 싶다. 가끔 글이 막힐 때면, 친구의 말을 떠올리면서, '너무 멋지게 쓰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글을 써보자.'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 그 문장들이 누군가에게 닿을지, 어떤 반응을 얻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진심을 담아 쓴 글이 가장 멀고 깊게 도달할지도 모르기에 오늘도 다시 마주해 본다. 나의 마음이 머문 순간을 그 안에 흐르는 감정을, 그리고 마음이 담긴 문장을. 나에게 위로가 됐던 순간들처럼. 언젠가 누군가에게도 조용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