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치유
3년 전, 나는 무심코 발길이 닿은 작은 서점 문구코너에서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딱히 특별한 점이 없는, 가죽 재질도 아닌, 그저 평범한 하드커버 노트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끌렸다.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무언가를 드디어 발견한 것 같은 설렘이었을까. 집에 돌아와 노트 첫장에 '성장 일지'라고 적는 순간, 묘한 무게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이 사소한 행동이 내 회복 여정의 결정적 전환점이 될 줄은, 그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 몇 주간은 그저 빈 페이지를 앞에 두고 망설였다. 손가락 끝에서 펜이 떨렸고, 마음속에선 끊임없이 의문이 일었다. '무엇을 써야 의미가 있을까?' 불안과 회의감이 밀려올 때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겼다. 그러나 어느 흐린 오후, 창밖으로 내리는 가랑비를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기록하지 않으면 모든 순간은 흐려질 테니, 지금이 순간의 나를 남겨두자'. 그래,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매일 짧게라도 나의 변화를 담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시작된 첫날의 일기는 고작 세 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세 줄은 내 인생을 바꾸는 첫 문장이 되었다. "오늘 옛 친구 K의 연락을 무시했다. 답장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한참을 맴돌았지만, 결국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가슴 한구석이 아프면서도,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이것도 내 시간과 에너지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일주일이 지난 후,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더 깊은 감정을 페이지 위에 쏟아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의 시간이 흘렀다. 때로는 매일 일기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일주일간 펜을 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꾸준함이라는 것을 배워갔다.
가스라이팅에서 회복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극적인 해피엔딩 같은 순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하나하나 쌓여가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작은 승리들의 연속이다. 한 걸음씩, 때로는 주저하며, 때로는 뒷걸음질 치기도 하지만, 결국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을 되찾아가는 여정이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후에는 우리의 뇌가 긍정적 경험보다 부정적 경험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경과학자들은 이것을 '부정성 편향'이라고 부른다.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는 종종 우리의 회복을 방해한다. 뇌는 위험 신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었기에, 우리는 '난 여전히 제자리인 것 같아'.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어'라는 착각에 쉽게 빠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록의 힘이 더욱 중요해진다. 기록은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되어준다.
나는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서랍 깊숙한 곳에서 3년 전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가스라이팅 관계의 한가운데 있던 시절의 나. 그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감가이 밀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때의 일기는 완전히 낯선, 마치 타인의 글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일기장과 지금의 일기장을 나란히 놓고 보니, 마침내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불과 3년 전만 해도 나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모든 불화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으며, 타인의 승인 없이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일기에는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어조가 담겨 있다. 이제는 내 목소리에 자신감이 실려 있고, 나의 감정과 경계를 존중할 줄 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나침반으로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마치 오랫동안 흐린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다가, 드디어 깨끗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 같은 선명함이 있다.
작고 구체적인 승리에 집중하기 : 거창한 변화망이 성장의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상의 작은 성공들이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 "아침에 일어나 10분간 명상했다.","런닝머신 속도를 올리고, 2분간 멈추지 않고 뛰었다.","관계를 정의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했다" 같은 미세하지만 의미 잇는 순간들을 꼼꼼히 기록해라. 마치 모자이크 작품처럼, 작은 조각들이 모여 결국 아름다운 전체 그림을 완성한다. 나의 경우, 처음으로 전화를 받지 않을 권리를 행사한 날, 식당에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정중히 돌려보낸 날, 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냈던 날...이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감정의 변화도 중요하다. 변화에 귀기울여 보자 : 행동의 변화만큼 감정의 변화도 중요한 성장 지표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예전보다 덜 불안하거나, 더 편안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분명한 성장의 증거다. "예전 같았으면 이 상황에서 무너졌을 텐데, 오늘은 심호흡 세 번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거절당했지만, 과거와 달리 그것이 나의 가치를 웨손하지 않는다고 느꼈다"와 같은 내적 변화에 주목하라. 이런 미묘한 감정의 변화는 외적인 행동 변화보다 앞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마치 빙산의 90%가 물속에 숨겨져 있듯이, 우리의 성장도 대부분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먼저 시작된다. 그러니 작은 감정의 변화도 소중히 기록하자.
비교는 오직 과거의 자신과만 하자 : 타인과의 비교는 회복 여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자의 여정과 속도, 출발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달리고 있을 때 당신은 걷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제보다 오늘 한 걸음 더 나아갓다는 사실이다. 오직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라.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 조금의 진전이라도 기꺼이 축하하라. "전에는 이런 상황에서 일주일을 무기력하게 보냈을 텐데, 오늘은 하루만에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와 같은 작은 진전에도 의미를 부여하라. 이런 자기 인정의 순간들이 모여 자존감을 다시 쌓여올릴 수 있다.
실패와 후퇴도 정직하게 기록하자 : 완벽한 회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예전 패턴으로 돌아가거나, 자기 의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는 날들도 있다. 그런날들도 정직하게 기록하고, 그것 또한 여정의 중요한 일부로 받아들이자. 후퇴는 실패가 아니라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마라톤 선수가 숨을 고르듯, 회복의 여정에서도 가끔은 멈추어 서서 숨을 돌릴 필요가 있다.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도, 그것은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일 뿐이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한 부분이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3년전부터 작성한 일지와 일기를 꺼내 나만의 특별한 의식을 가졌다. 밤이 깊어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고 모두가 잠든 시간, 책상 위에 조명을 켜고 처음 일기를 시작했을 때의 페이지와 최근의 페이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써온 모든 페이지를 한꺼번에 펼쳐둔다면 아마도 거실 바닥 전체를 덮었을 것이다. 3년간의 여정, 수백 개의 작은 승리와 도전, 눈물과 깨달음이 담긴 페이지들.
그 차이는 놀라웠다. 마치 두명의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았다.
예정의 나는 '미안하다','걱정된다','두렵다','해야한다'와 같은 단어들로 가득 찬 문장을 썼다면, 최근의 나는 '선택했다','결정했다','깨달았다','원한다'와 같은 주도적이고 자기 확신에 찬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타인의 반응과 평가에 초점을 마주었다면, 지금의 나는 내 경험과 성장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예전의 일기에는 물음표고 가득했다면, 요즘의 일기는 마침표와 느낌표로 채워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회복이구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극적인 변화가 아닌, 매일의 작은 선택들과 미세한 인식의 변화가 모여 내 전체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물론 회복의 여정은 결코 직선적이지 않다는 것도 이해하게 됐다. 때로는 앞으로 두걸음 나아가다가도, 갑작스러운 트리거로 인해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어두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옛 친구의 목소리 톤이 가스라이터를 떠올리게 해 갑자기 가슴이 조여오고 호흡이 가빠진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불안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불쑥 찾아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날들도 회복 여정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더 친절하고 인내로울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날씨가 흐리다고 해서 태양이 사라진 것이 아니듯, 일시적인 후퇴가 전체 여정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은 갑자기 과거의 감정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잠시 길을 잃은 것 같았고, 모든 노력이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심호흡을 하고 현재에 집중했다. 나에게 말했다. '괜찮아, 오늘은 힘든 날이야. 하지만 내일은 다를 거야. 그리고 넌 이미 충분히 강해졌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라도, 그동안 수백 걸음을 앞으로 나아왔음을 기억해.' 그리고 잠시 후, 마음의 폭풍이 잦아들었다. 이런 순간들조차도 이제는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어떤 단계에 있든, 기억하라. 당신은 이미 회복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 첫걸음은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지금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미 수백 걸음을 걸어왔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매일의 작은 성공들을 기록하고 축하하는 것은, 미래의 당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언젠가 당신도 과거의 일기를 펼쳐보며 깨닫게 될 테니, '아, 나는 정말 멀리왔구나. 내가 이렇게 변할 수 있을 줄 몰랐어'라고. 그날의 당신에게 미리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오늘의 당신에게는 이 문장을 선물한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또는 잠들기 전 조용히 자신에게 말해보길 바란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한걸음 더 성장했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며, 매일 조금씩 더 강해지고 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은 유효하고, 내 감정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
매주 목,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