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낭비해보자'라고 결심했다.

by 오지

내 과거는 언제나 조급했다. 학교를 다녀도 회사를 다녀도 남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 했다. 학원을 끊고, 여러 모임에 나가고, 운동을 했다. 남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퇴보될 것 같은 불안감이 더 컸다.


옹졸하게도 주변에 자기 계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생각했다.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들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며 은근히 스스로를 치켜세웠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난 여행을 더 가치 있게 만들고자, 마음속 한 꿈이었던 '기자'가 되어 세계 각지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영상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여행 시작부터 여행과 인터뷰 두 가지를 다 잡고자 한 게 큰 화근이었다.


세계일주 첫날은 러시아 횡단열차를 타는 계획이었다. 횡단열차의 시작인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를 탔다. 정말 재밌다고 들었던 횡단열차였는데, 나에게는 최악이었다. 내가 탄 칸에는 한국인이 아무도 없었고, 러시아인들은 영어를 잘 못했다. 나도 그들에게 흥미가 있었고 그들도 나에게 흥미가 있었지만, 둘 다 선뜻 다가가기 힘들었다. 중간에 러시아 군인 친구들을 만나 얘기하는 재밌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하루 반나절을 머물다 떠나버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횡단열차는 지구를 종단이 아니라 횡단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다운로드로 받아간 '나 혼자 산다' 두 편을 다 보고 할 일이 없어서 낮잠을 청했는데, 일어나 보니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횡단으로 가로지르니 그만큼 시간도 늘어난 것이다. 24시간이 아니라 체감상 하루를 50시간을 보낸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허무했다. 버스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 게 내 즐거움이었는데, 달려도 달려도 나뭇가지만 보고 있자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처음부터 삐그덕거리는 여행에다가 내가 여행을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과 인터뷰까지 더해져 사람을 구하고 대본을 짜고, 편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괴로웠다. 이런 불안한 여행은 불안한 상황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인터뷰에 응해줄 사람을 한인커뮤니티이나 페이스북으로 어렵게 구하면, 질문을 만들고, 시간을 잡고, 인터뷰를 하고, 영상을 만드는 데까지 24시간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이 10여분짜리였다.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고, 영상이 잘 나오면 성취감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이렇게 일만 하다가 여행은 또 언제 하지? 저기는 언제 가지? 여기는 언제 가지?

갈수록 상황에 의심이 갔다. 오스트리아 빈, 모두 놀러 나간 6인실 도미토리 책상에 앉아서 드는 생각이었다. 일하기 싫어서 퇴사하고 온 여행인데, 난 지금 다시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갈수록 노트북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 아, 영상 만들어야 되는데, 언제 만들지는 까마득하고, 점점 하기가 싫어졌다.


여행과 일.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나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처음이어서 더 헤맸다. 애초에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했어야 했다. 일할 때는 일을 하고, 여행할 때는 여행을 하자라며. 일과 여행,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스킬이 없었다. 그전에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으려 한 시도가 잘 못 됐는지도 모른다. 나는 멀티가 안 되는 사람인 걸 여행이 다 끝난 지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그릇들을 담아낼 역량이 없었을뿐더러,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도 저도 아닌 생활을 반복할 때쯤, 세상은 내게서 노트북과 그동안 찍은 인터뷰 영상을 모조리 빼앗아갔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물함을 모조리 털린 것이다. 현금, 카드, 민증, 여권과 함께 할머니가 만들어준 복대주머니까지 모두, 모조리. 그때 충격은 정말 이루 다 말하지 못한다. 정말 어렵게 찍은 영상들이었고, 노력이었고, 추억이었고, 혹은 미래였다. 나는 그 인터뷰 영상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잡지사로 이직하고 싶었다. 근데 그것들을 모조리 잃어버리니 인생이 끝나버린 느낌이었다. 미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몇 날 며칠을 혼자 울면서 지새웠다. 주변에서 위로해 주고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낯선 땅에서 낯선 일을 당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너무도 버거웠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가서 좀 쉬고 다시 시작할까, 계속 이 여행을 해야 하나.’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결론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알고 있듯, 세계일주를 완주했다. 고민 끝에 여행을 다시 시작한 후부터는 오로지 여행에만 집중했다. 카메라로 풍경을 담기보다 눈으로 풍경을 담는 데에 더 집중했고, 사람과 음식, 문화, 내 감정, 내 생각에 더 집중했다. 생각해 보면 사실 인터뷰도 어떤 의미부여를 위한 일이 아니었을까. 여행 자체를 무의식적으로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베짱이처럼 핑자핑자 놀러 간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했고, 그래서 ‘나 일이라도 했어. 마냥 놀지만은 않았어.’라고 증거를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귀중품을 다 잃어버린 덕에, 훨씬 더 여행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행복했던 날이 많았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강박이 조금씩 머리에서 사라지면서, 결국은 그냥 가만히 공원에 앉아서 사람과 개와 새들을 구경하고, 햇살과 자연이 주는 냄새를 맡고 있을 때가 제일 좋아졌다.

시간은 귀중한 거니깐 알뜰히 써야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점점 ‘시간을 낭비해보자’라고 말했다. 편하고 여유로운 상황은 불안하다던 사람이, 여유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요즘에도 할 일이 많을 때는, 차라리 올 스탑하고 멍을 때린다. 그러고 나면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걸 제일 먼저 하면 된다. 그리고 집중력은 덤으로 따라온다.


지금의 나는 무엇보다 휴식과 쉼,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1순위로 둘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들 때, 오히려 가만히 불안을 느끼면서 마음을 비우면, 그 다음부터는 여러분의 몸은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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