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독히도 미워해본 자만이 나를 사랑할 수 있다

by 오지

나는 근 몇 년 동안 깊은 어둠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수십번 반복했다. 어느 시기는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가 하면, 어느 시기는 모든게 다 싫어서 도망가고 싶고, 빨리 이 생이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만하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는 소리가 계속해서 맴돈다. 루루는 무엇을 그렇게 그만두고 싶었을까? 루루에게 물어봤다.


“너는 뭘 그만두고 싶은거야?”

“회사부터 해서, 사람과의 관계, 미래에 놓여진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의식주부터 그냥 당장 모든게 사라져 버리면 좋겠어. 내 눈앞에 있는게 모두 사라지던지, 내가 사라지던지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될 것 같아.”


굉장히 염세주의적인 발언을 하는 루루였다. 하지만 나는 루루의 더 깊은 마음에 있는 소리를 들었다.


‘모든 상황이 다 좋아져서, 살고자 하는 희망이 생기면 좋겠어. 의욕도 넘치면 좋겠어.’


우울증이 참 힘든 점은 약을 먹던지 상담을 하던지 도움을 받을 수야 있겠지만 결국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우울증을 깨닫기까지도 힘들고, 갑자기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하다. 결국은 내가 내 발로 정신과를 찾아가고, 상담사를 찾아가고, 명상도 해보고, 일기도 써보고, 관찰도 해보고, 그 전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때와는 완전 다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나 스스로 감당해내야 하는 인생의 큰 숙제다. 우울한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꺼내기도 참 힘들다. 누구와 이 부분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싶기도 한데, 꺼내기 부끄럽기도 하고, 과연 이 사람이 날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서 얘기하길 꺼려지는게 사실이다.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깐.


참 활발하고, 용기 만땅으로 채워졌던 20대 초를 지나 삶에 우울증이라는 것이 나에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내 인생에는 그런 단어란 없을 줄 알았다. 그렇게 강하고, 강한줄만 알았던 내 자신이 시들시들해지는건 한순간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왔고, 하지만 서서히 침투해온 것 같았으며, 내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고, 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상황을 어찌할 수 없어 심란하고 막막한 느낌을 당신도 느껴보았는가?


환경이야 어떻게든 내가 만들고자 하면 할 수 있었다. 헬스장을 꾸준히 가서 운동을 하거나, 밤산책을 하거나, 사람 많은 모임에 나가 친구를 사귀거나. 하지만 애초에 그런 의지조차 내기 어려웠다. 열정은 옛말이 되어갔다. 활활 타던 불꽃이 촛농으로 인해 점점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정신적인 힘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기운이 없어졌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썪어서 색을 잃어가는 것 마냥 나도 힘을 잃어갔다.


자기비판이 너무 심해졌다. 그저 몸과 마음이 힘들어 축 늘어졌을 뿐인데, 그런 나의 모습은 보기조차 싫었다. 힘을 잃어갈수록 나는 내가 더 싫어졌다. 유튜브에 떠도는 자기개발 동영상들도 한 몫했다. 동기부여 영상들은 죄다 ‘지금 당장 일어나세요. 그리고 앞을 향해 걸어가세요. 당신은 두 다리가 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이 희망찬 말만 난무했다. 처음에는 나도 억지로 힘을 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하면 할수록 나는 더 어둠에 잡아먹혔다. 이렇게 노력해도 나는 안된다며 다시 좌절하고, 자기비판을 했다.

그들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상황에 맞는 내용들은 아니였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잘못된 정보도 과다하게 많아진다. 여러 방법들을 따라하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더 안좋아지기도 했고, 더 좋아지기도 했다. 모든 방법이 나에게 맞는건 아니라는걸 깨닫고는, 자연스레 손을 떼었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맞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탁월한 선택임을 알았다.


다른건 다 몰라도 이거 하나는 영원불멸하게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감정 수용’이다. 나는 내 감정을 수용하지 않았다. 아니, 할 줄 몰랐다. 나에게 제일 가까운 사람은 완벽한 회피형이었고, 나는 어디에서도 감정수용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감정을 수용하고 승화시킨다는 표현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열정 많던 이십대 초반에 이 얘기를 들었다면 ‘그게 뭔데요? 전 이미 제 감정을 다 아는데요?’하고 넘겼을게 뻔하다. 지금와서 보면 나는 나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겉으로 표현해내는 감정이 아닌, 진짜 속마음.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속마음은 항상 무시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우울함은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우울증에 걸리고서야 나는 ‘감정’이란 것에 관심이 생겼다. 감정을 관찰한다는 것은 어떤 외부의 반응이 왔을 때, 내 마음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알아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자신과 대화를 하는동안 표정이 안좋다고 느껴지면, ‘내가 뭘 잘 못 했나? 나 때문에 그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사실 상사는 실제로 기분이 좋았을지 나빴을지도 모르고, 다른 무언가에 스트레스가 쌓여 불쾌한 표정을 지었을 수 있다. 자신은 상대방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그 이유가 자신이라고 느꼈을까? A라는 값을 입력하니 뇌에 있는 전산은 B라는 값을 도출했다. 나의 뇌는 어떤 과정을 통해 값을 내었을까? 이 과정을 면밀히 분석해보는 것이다. 나는 이를 통해 많은 회로를 발견했다. A에서 B로 가게 만드는 뇌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과정을 알아야만 했다. 참 힘든 과정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익숙해져서 예전보다는 빨리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자신을 관찰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 모든게 뜬구름 잡는 말같았다. 그래서 감정을 수용하라 하면 감정대로 행동하라는 느낌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개념을 잡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감정을 세밀하게 인식할 수록 나 자신이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만 알았는데, 무의식적으로 하는 생각과 행동은 너무 낯설었다. 예를들어 나는 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무의식에서는 돈에 엄청난 욕심이 있었고, 돈을 밝히는 사람은 질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 왜 그런 개념이 무의식 속에 있었을까 파헤쳐 보니, 어렸을 때부터 외벌이를 하던 엄마는 ‘돈이 없으면 불안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돈이 자신을 힘들게 했던 만큼 돈을 증오하기도 했다. 엄마는 돈을 아끼기 위해 한정거장도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신기하게 나는 엄마와 똑같이 생각하고 했동하고 있었다. 슬픈건 루루는 항상 엄마에게 돈보다 뒷전인 아이로 스스로 인식했다. 그 점이 제일 돈을 싫어하게 만들었던 이유같다. 결국 엄마의 무의식을 이어받았다. 돈은 그저 돈일 뿐이었는데.


모든 문제에 세상은 결코 정답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쉽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는 조금씩 나를 관찰하는데 익숙해졌다. 나를 괴롭히는 존재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임을 새롭게 깨달았다. 우울할때는 우울하면 안된다며 나무랐고, 헤이해지면 나약한 내 모습이 싫었다. 습관처럼 많은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누가 명령을 내리면 극도록 따르기 싫어하는 청개구리 성향이 있는데, 어쩌면 제일 강압적으로 나를 구속하고 있던 건 나였고, 그걸 따르기 싫다는 내면이 행동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슬픔에 빠지지 않고, 항상 행복하고, 항상 웃고, 모든것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면 힘들어하는 사람의 마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에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들이 약해보인다는 이유로 하찮게 생각했던 사실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한다. 그래서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지난날의 오만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감정이란 것은 지구에 살아가는 생물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 아주 세밀하고 복잡한 감정이 너무 신기해서 지구에 있는 모든 감정을 다 느껴보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고, 흑과 백, 사랑과 증오, 전쟁과 평화와 같이 이분법적 의미가 담겨있다. 자기사랑 또한 자기를 미친듯이 미워해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내가 나를 싫어하는 것조차 받아들이려 노력해본다. 어쨌든간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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