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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Oct 18. 2019

'시간을 낭비해보자'고 결심했다.

1년 세계일주 그 후/ 제일 중요한건 선택과 집중이다.

 내 과거는 언제나 조급했다. 학교를 다녀도 회사를 다녀도 남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한다며, 학원을 끊고, 여러 모임을 나가고, 운동을 했다. 남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퇴보될 것 같은 불안감이 더 컷던거 같다. 


 옹졸하게도 주변에 자기계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을 잘 못 살고 있다고 멍청한 판단을 하고 다녔다. 날 제외한 주변 사람들을 '시간 낭비 쟁이'로 치부했다. 3개월동안 책 한권 읽지 않는 사람들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며 날 치켜세웠다. 은근 속으로 깔봤던거다. 그렇다고 그들보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여행이 시작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난 여행을 더 가치있게 만들고자, 마음 속 한 꿈이였던 '기자'를 이뤄보고자 세계 각지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영상을 만들기로 다짐한다. 여행 시작부터 여행과 인터뷰 두가지를 다 잡고자한게 큰 화근이였다. 혼자하는 여행이 익숙해서 세계일주 하면서도 외롭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였다. 몇번 국내여행, 일본, 중국 3박 4일씩 혹은 일주일씩 여행한거 가지고 날 과대평가 했던거다. 


 세계일주 첫날에 러시아 횡단열차를 블라디보스톡에서 탔다. 정말 재밌다고 들었던 횡단열차였는데, 최악이였다. 내 칸에는 한국인이 아무도 없었으며, 러시아인들은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했다. 나도 그들에게 흥미가 있었고 그들도 나에게 흥미가 있어보이는 듯 했지만, 선뜻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중간에 러시아 군인 애긔들을 만나 재미 좀 봤지만, 단 하루 반나절을 머물다 떠나버렸다. 기차에서 보내는 3일째가 되던 날이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횡단열차는 지구를 종단이 아니라 횡단한다는걸 알아야한다. 다운 받아간 '나혼자산다' 두편을 다 보고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좀 흐르길 기대하면서 낮잠을 청했는데, 일어나보니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24시간이 아니라 체감상 하루를 50시간동안 보내고 있는 느낌이였다. 기분이 엿같았다. 그때 창문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미친. 우울증 걸릴거같아.



 갑자기 얘기가 새나갔지만, 그런 처음부터 삐그덕거리는 여행에다가 내가 여행을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 인터뷰 할 사람을 구하고 대본을 짜야한다는 압박감을 혼자 스스로 짊어졌다. 이런 불안한 여행은 불안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거다.


 인터뷰 할 사람을 한인커뮤니티, 페이스북을 통해 어렵게 구하면, 질문을 만들고, 시간을 잡고, 인터뷰를 하고, 영상을 만드는데까지 10여분 영상을 만드는데 24시간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재밌어서 몰입하게 되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였다. 과정이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하지만 숙소에 박혀서 영상을 만들고 있으면 창문 밖에서 어서 오라고, 여기 와서 뭐하냐며 새로온 방문객인 나에게 도시는 손짓했다. '하. 영상 만들어야 되는데. 근데 난 여행온거잖아? 오늘 관광해야겠는데. 그래도 이건 빨리 끝내고 싶어.' 


근데 나 지금 뭐하는거지?'


 오스트리아 빈, 모두 놀러나간 6인실 도미토리 책상에 앉아서 드는 생각이였다. 일하기 싫어서 퇴사하고 여행 온건데, 난 지금 다시 일을 하는 기분이네? 노트북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 아, 영상 만들어야 되는데, 언제 만드냐. 라면서. 갈수록 심해졌다.


 여행과 일. 두마리 토끼를 잡는건 나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였다. 나는 그 그릇들을 담아낼 역량이 없었던거다. 그걸 알고있었던 신은 내게 노트북과 그동안 찍은 인터뷰 영상을 모조리 뺏아갔다. 스페인 마드리드 사물함을 모조리 털린것이다. 현금, 카드, 민증, 여권과 함께 모조리. 그때 충격은 정말 이루 다 말하지 못한다. 정말 어렵게 찍은 영상들이였고, 노력이였고, 그동안 찍은 내 추억들이였다. 인생이 끝나버린 느낌이였다. 몇날 몇일을 혼자 울면서 지새웠다. 낯선 땅이였고, 주변에는 위로해줄 따뜻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더. 한국으로 돌아갈까, 가서 좀 쉬고 다시 시작할까, 계속 해야하나.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꿈이겠지 라며 일어나고, 내 미래도 같이 사라진 기분이였다. 인터뷰 영상을 포트폴리오로 쓸 생각이였어서 내 꿈도 한치 더 멀어진 것만 같았다. 여행 나온걸 후회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그지같은 여행을 할 바에,
이 돈으로 한국에서 호화롭게 맛있는 한식이나 먹을 수라도 있지.
여행을 한다고 성장하는게 아니였어.
그냥 삶을 사는 것만으로 성장하게 되있는 거야. 


 이때부터 조금씩 깨달았던 것 같다. 아무도 열등한 사람이 없고, 자기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대단한거라고.


사물함 털린 날, 아무것도 모르고 좋다고 돌아다녔던 세비야


  하지만 신이 준 그 시련의 상황이 내 여행을 더 빛나게 만들어줬다. 인터뷰를 (강제로) 끊고 나서 나는 완전히 여행에 몰두했다. 한 도시에서 얼마나 머물지를 인터뷰에 맞췄다면, 그 이후부터는 오로지 나에게 맞췄다. 모든 시간을 내게 쏟았다. 부담 하나를 내려놓으니 빈 부분은 여행에서 느끼는 큰 감동으로 채워졌다. 그 때 잃어버려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행하면서도 그렇고 지금도 계속 생각한다. 사라져버린 맥북과 자료들은 아깝지만 앞으로 내 미래는 그것들보다 더 밝을 것을 알기 때문에.

 



 이집트 다합에서 보낸 한달은 내게 금같은 시간이였다.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도 모두. 늘어지기 좋은 마을이고, 실제로 모두가 그랬다. 나만 빼고. 인터뷰 해야한다며 영상 찍어야 된다며, 나가서 사진 찍어야 된다며, 놀러나가야 한다며 혼자 조급하고 바빳는데, 같이 할 사람들은 낮잠 잔다고 하니 강제 휴식 시간을 보냈다. 


 다합에서 활동하는 스쿠버 다이빙 선생님이 인터뷰하면서 그런 얘기를 해주셨다. 


여행에서는 자기가 해보지 않은걸 해봐라. 담배를 안피우던 사람이면 담배를 피워보고, 남자도 막 사겨보고, 바쁘게 살았으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봐라.


 그래서 선생님 말대로 한국에서 지내던 삶을 던지고 반대로 살아봤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든게 아닐까 싶다. 다 던져버리고 게으른 삶을 살아보니 뭘 하지 않는다고 기회가 오지 않는건 아니더라. 같은 말로, 굳이 찾아다닌다고 모든게 기회가 되지는 않더라. 그리고 기회가 왔을때 아껴뒀던 체력과 돈을 집중해서 쓰면 된다. 쓸떼없이 소비하는게 아니라. 제일 중요한건 선택과 집중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과거에 내가 깔보던 사람이 되었다. 아마 누군가 요즘 나를 본다면 또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욕먹어도 마땅하지. 


 이제는 안다. 텅빈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 떠오르는 영감과 직감을 받아들이는 준비이며, 계획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올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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