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이모, 나랑 스페인 가자!

조카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라

by Carpe diem


“엄마,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초등학교 학습 만화를 보던 조카가 엄마에게 물었다. 제 엄마인 내 여동생은 스물여덟에 결혼해 허니문 베이비로 조카를 낳았다. 그러니 우리 조카가 생긴 곳은 스페인이고, 넌 스페인에서 생겼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조카의 다음 타깃은 ‘스페인’ 관련 학습 만화로 정해졌다. 여덟 살 어린아이가 제 근원지에 대한 애착이 저리 강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정독하는 조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리 좋냐 물었다.


이모, 나랑 스페인 가자.



좋다는 당연한 대답 대신 돌아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왜 이모랑 가고 싶냐 물었더니 엄마랑 아빠는 이미 다녀왔으니 다음 차례는 이모란다. 제 부모와 동일선상에 이모를 두는 조카. 아이의 마음은 시간과 정성을 쏟은 만큼 움직인다는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자신할 만큼 나에게 조카는 낳아보지도 못한 자식만큼이나 귀하고 사랑스럽다.


“그래. 가자.”


엉겁결에 조카에게 대답하고 3년이 지났다.





마흔을 맞이하기 전, 지나치게 고단했던 서른아홉을 정리하며 지친 나를 위한 선물이 필요했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나 홀로 유럽 여행에 도전해 보자 결심한 후 목적지를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확정하고 동생이랑 이야기하는데, 조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하다.


“이모, 스페인은 나랑 가기로 했잖아.”


‘이모는 약속을 허투루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굳게 믿고 있는 조카에게 어른들 인사치레 같은 약속을 해버린 셈이다. 두 눈 질끈 감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다녀온 그리스 여행이 불과 얼마 전이니 이모와 가는 여행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타일렀다. 그러나, 행선지가 스페인인 이상 마음은 계속 편치 않았다.


여행 이야기만 나오면 주변을 맴도는 조카의 눈빛이 미련으로 가득했고, 결국 조카의 아련함이 재충전을 원한 나의 욕망을 이겼다.


그래, 서현아. 스페인 가자!


그렇게 서현이와 나는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나 혼자 떠났다면 자유 여행으로 유유자적했을 시간들과는 안녕이나, 가우디의 생애를 줄줄 읊어대는 서현이의 상기된 표정에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이 찾아왔다. 빠에야를 먹고 가우디의 건축 양식이 고스란히 담긴 바르셀로나를 걸을 생각에 신이 난 열한 살짜리 조카와 떠나는 여행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아끼는 학습 만화를 숙제처럼 안겨주는 조카가 귀여워 꼼꼼히 읽고 서현이의 스페인 브리핑을 들었다. 내가 원해서 떠나는 진짜 여행을 시작한 게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후였는데, 이렇게 빨리 스스로 공부하고 의욕적으로 여행을 준비하는 조카가 대견하기도 하고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는 동생네 부부가 대단하다 여겨지기도 했다. 부모가 아닌 사람이 아이와 떠나는 여행을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들이 좀 있었으나 아이의 안전을 위한 일이니 번거롭지 않았다. 자유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패키지여행을 선호하지 않지만 조카와 나의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위해 온전한 자유도 약간 내려놓고 패키지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모, 나 내일 이모 집에서 자도 돼?”


여행을 떠나기 전날, 여행 중 본인이 입을 옷들을 챙기는 일도 나와 함께하려는 조카의 여행은 이미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시작된 듯했다. 캐리어를 모두 챙겨 놓고 함께 나란히 누워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카와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다들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조카와 떠난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부러움이 반감되었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오히려 그 여행을 꼭 해내고 싶어 졌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낯선 나라에 가장 익숙한 아이와 함께 하는 첫 경험은 나에게도 조카에게도 난생처음이니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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