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 그런 부자라면 사양할게요.

300만원짜리 인생 수업 수강기

by Carpe diem



8월, 서울에서 남양주로 이사를 오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집값 폭등으로 6월에 계약한 지금 집의 당시 집주인이 이사 날짜 열흘을 앞두고 집값을 올려주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이전에 쓴 글(하마터면 길거리에 나앉을 뻔했다.(1), (2))대로 정말 순식간에 갈 곳 잃은 채 길거리로 나앉을 뻔했다. 이에 맞물려 계약 파기를 기정 사실화하고 다른 집을 맞물려 알아보던 중,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업무까지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결국, 퇴근 후 집을 알아보러 다녔으나,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 사듯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라 내게 맞는 매물을 짧은 기간 내에 혼자 찾아내는 건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가족들에게도 도와달란 말을 못 하는 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빠는 이런 딸내미가 가여워 결국 아는 부동산 업체 사장님을 대동하여 지원 사격에 나섰다.


난 늘 부모님의 도움이 닿는 순간이 불편하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괜한 수고로움을 얹어드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 초라해져 되도록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고, 설사 알게 되더라도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곤 한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고, 난 또 고마움 대신 불편한 기색만 잔뜩 드러낸 채 자존심만 부리기 일쑤다. 돌아서자마자 후회할 걸 알면서도 난 늘 변함이 없다.


아빠가 나를 도우러 출동한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날이었다. 운전을 좋아하던 아빠가 부쩍 운전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걸 안 어느 날, 이제는 운전석보다 보조석이 편하다는 아빠의 말이 퍽 쓸쓸하게 느껴졌다. 자식들이 다 운전을 하니, 이제 이런 호사도 누리는구나 말하는 아빠의 말이 유난히 공허하게 느껴진 건, 불과 얼마 전 총기가 자꾸 떨어지는 것 같아 괴롭다는 아빠의 호소를 듣고 난 다음이라 그랬던 것 같다. 새로운 길을 가는 걸 주저하지 않던 아빠가, 지도를 보지 않고도 모르는 길을 척척 찾아가던 아빠가 판단력과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그 말이 유독 슬프게 느껴져 비 오는 날 운전까지 해서 나를 도우러 오는 아빠가 걱정스럽고 미안해 자꾸 화만 내는 못난 딸이 바로 나였다.

“아빠 지금 근처 부동산인데, 네가 마음에 든다는 매물이 뭐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빠의 화려한 이력들은 여전히 빛이 난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아빠는 배움을 쉬지 않았고, 늘 아빠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오래전 취득해 두었던 아빠의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집을 매매할 때마다 든든한 무기가 되었다. 무엇이든 배워서 나쁠 게 없다는 걸 아빠는 늘 몸소 보여주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매물 곧 나갈 것 같다. 일단 붙잡아 두는 게 좋으니 계약금 300만 원 정도 이체하자.”

그런데, 곧이어 다시 전화를 걸어온 아빠의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급한 건 사실이지만 계약서도 매매인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대뜸 돈부터 보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재차 아빠를 설득했으나 소용없었다. 매매인도 계약서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돈부터 보내는 건 어쩐지 꺼려졌으나, 같이 간 부동산 사장님 앞에 놓인 아빠의 체면을 지켜드리고 싶기도 하고 아빠는 늘 옳았으니 믿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300만원을 이체했다. 그렇게 조금 무리해서라도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에 한 번 살아보나 기대하며 현 계약된 부동산의 계약 파기를 확정 지으러 갔다가 오랜 실랑이(좋게 말해 실랑이였으나 정말 길고 긴 싸움) 끝에 원상복구를 약속받고 계약 파기를 무효화했다.

그러자, 아빠의 말에 보낸 300만원을 당장 돌려놓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구두 계약을 무효화하자고 말했고, 얼굴조차 본 적 없는 매매인과의 길고 긴 싸움은 시작되었다. 며칠 후, 우리 엄마와 아빠의 끊임없는 연락에 ‘사정 봐드려서 200만원을 보냈다’는 상대의 회신이 왔고, ‘사정을 봐드렸다’는 상대의 말에 기가 막히면서도 돈 주는 사람이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속수무책이란 걸 알기에 나머지 100만원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는 거냐 물었더니, 매물이 팔리면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역시 돈 앞에 장사 없다.


가계약이라도 계약은 계약이라며 없는 계약서 앞에 매매인은 돌려줄 생각을 안 했고, 이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예산에서 비어버린 300만원에 아무 말 못 하고 전전긍긍하는 사이, 아빠가 두툼한 돈봉투를 내밀었다.

“아빠도 이번 기회에 인생 경험 제대로 했다. 세상이 다 내 마음 같진 않더구나.”

아빠 돈은 돈이 아니냐며 받을 수 없다고 말했으나, 어떻게든 받아낼 테니 걱정 말라고 웃어보이는 아빠를 보며 일면식도 없는 그 여자를 사정없이 질타했다. 아무리 돈으로 맺어진 관계라 할지라도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그 돈이 건너간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반환을 요구했으면 충분히 돌려주는 게 인간의 도의가 아닌가. 자기 돈이 아닌 걸 손에 쥐고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환갑을 훌쩍 넘긴 아빠가 그 여자에게 사정을 하고, 때론 어름장도 놓으며 옥신각신하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 직접 전화를 걸었을 때, 내 나이 또래나 될까 싶은 여자의 음성에 더 화가 나 논리적으로 따져 물었다. 그러나, 계약금을 돌려주는 경우는 없다며 논리와 양해 따위는 먹히지도 않는 상대의 태도에 질려서 결국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던 중, 그 매물이 계약 완료되었다는 부동산의 연락으로 또 긴 싸움이 시작되었고, 될 때까지 해내고야 마는 아빠의 집념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아빠의 소중한 시간과 감정이 일개 100만원 앞에서 소모되는 게 너무 싫어서 이쯤에서 그만 하시는 게 어떠냐 말했다가 결국, 늘상 들어오던 아빠의 걱정 어린 잔소리로 핀잔은 시작되고 말았다.


아빠의 메시지는 따뜻하지만 뼈가 있다.


그래서 부자가 되는 거야, 이 맹탕아.


나는 부자가 되긴 글렀나 보다. 늘 물러서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줄 모르는 나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빠는 엄마 아빠만 같지 못한 나의 경제관념이 늘 못마땅하다.


하고 싶은 건 되도록 누리고,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 돈을 버는 나의 소비 철학은 아끼며 자식 셋을 키워 온 부모님에게 못마땅한 게 당연하다. 그러나, 저렇게 남의 돈을 쥐고 자기 것인 양 당당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거라면 난 부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내 돈 관리는 잘해야 한다는 아빠의 뼈 있는 충고는 기꺼이 받아들이되, 사람 사는 세상에 최소한의 인정과 도의를 뒤로 한 채, 원칙과 법만 앞 세우는 사람이 되진 않을 것이다.


결국 100만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돈을 쥔 그 여자는 지금 행복할까. 우리가 통사정하며 전화를 걸었을 때 이렇게 연락 오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며 호소하던 그 여자의 스트레스는 지금쯤 말끔히 해소되었을까. 그 누가 천치라 말할지라도, 돈 앞에 장사 없는 세상일지라도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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