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rpe diem Feb 03. 2021

EP10. 남편의 흔적


오랜만에 이른 출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나보다 출근이 늦는 남편은 오늘도 흔적 없이 집을 비웠다. 그가 남긴 흔적이라곤 아침에 해놓은 밥을 한 그릇 챙겨 먹고 남은 밥을 살뜰히 담아 옹기종기 모아둔 밥그릇 세 개가 전부였다. 그렇게 그는 늘 한결같다.


나보다 과일을 예쁘게 깎는 남편


 남편은 알람 소리에 놀라 깬 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나를 위해 과일을 깎아 화장대 위에 올려두고, 청소기를 가볍게 돌린 후 밥솥 버튼을 누르고 옷을 챙겨 입는다. 주차장까지 나를 배웅하고,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세 번의 입맞춤을 한 뒤 다정히 손을 흔든다. 집으로 돌아가 그 날의 수업 준비를 점검하고 아침을 가볍게 챙겨 먹은 뒤 씻고 출근하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해진 루틴을 가진 남자와 산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안정적이고 행복한 일이다.



 나 혼자 사는 집에 남편이 입주하면서, 혹여 오랜 내 고집이 누군가와 어울려 사는 데 독이 되진 않을까 염려하며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다. 늘어놓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시도 때도 없이 주변을 치워대니 나는 혼자 살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온전히 내 기준에 맞춰주지 않으면 말하지 못한 채 스트레스를 받거나 말을 꺼냈다가 다툼이 잦아질 게 뻔했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사는 날들이 하루 이틀 쌓여갈수록 내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달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살던 패턴 그대로 유지되는 집을 보며, 살뜰한 그의 마음에 말없이 탄복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여보, 화장실 휴지를 꽂는 방향이 정해져 있진 않았나 봐.”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을 다녀온 신랑이 물었다. 화장지 롤이 앞으로 오게 하는지, 뒤로 가게 하는지마저 정해져 있는 줄 알았나 보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화장지를 앞으로 꽂든 뒤로 꽂든 사용하는 데 불편이 전혀 없었고, 외관상 거슬리지도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것마저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괜스레 미안해졌다.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 날 사용한 마스크를 미쳐 버리지 못한 채 화장대에 올려놓은 걸 조용히 버리거나 흐트러진 잠자리를 정돈하는 모습을 허투루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것까지 정하진 않아. 이제까지 그렇게 신경 쓰며 지냈던 거야?”

 미안하고 멋쩍어 되물었다. 어디선가 화장지 꽂는 방향 때문에 싸운 부부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며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맞출 수 있다면 맞춰주는 게 맞지 않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남편의 모범적인 반응에 되려 더 미안해졌다. “내가 좀 유난하지?”

 그런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하듯, 망설임 없이 따뜻하게 웃으며 아니라 말해주는 그의 배려가 당연한 것이 되지 않도록, 언제든 서운하거나 힘든 순간이 오면 기꺼이 말해달라고 했더니 그럴 일이 뭐 있냐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이런 사람과 사는 나의 결혼 생활은 현재까지 무탈히 순항중이다.

 “여보, 혹시 내 캐리어를 내가 가지고 왔었나?”

 드레스룸에 놓인 총 세 개의 캐리어를 바라보며 남편이 내게 물었다. 여행을 좋아해서 단기여행이든 장기여행이든, 단거리든 장거리든 언제 어떤 상황이든 짐을 쌀 수 있도록 다양하게 캐리어를 구비해 둔 난 캐리어마저 부자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남편도 캐리어 부자지만, 결혼하며 우리 집에 들어올 때 캐리어는 본가에 두고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미 부족함 없이 꽉 찬 집에 캐리어 개수까지 늘리는 걸 원치 않을 게 분명한 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본인의 캐리어에 대해 물었다.

 “왜 여보? 집 나가려고?”

 늘 딱 붙어있을 생각만 하던 남편이 갑자기 본인의 캐리어를 찾는 게 영 기분이 묘해서 장난처럼 웃으며 되물었다. 설 연휴 끝자락에 소소하게 잡아둔 강릉 여행이 생각나서 물어본 것뿐이라며 정색을 하는 남편이 귀여워 깔깔대며 웃었다. 집 나가고 싶은 일이 생겨도 말은 꼭 하고 나가라고 다시 한번 장난에 쐐기를 박았다. 장난으로도 그런 말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정색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흔적 없이 들어와 평소에도 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니는 남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물리적 흔적은 남기지 않지만, 정서적 흔적만은 ‘흔적’이라는 단어만으로 대체가 불가할 만큼 존재감이 명확해져, 이젠 남편 없는 집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는 게 놀라운 변화라면 변화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흔적이 된다는 건 분명 유의미한 일이다. 그 흔적이 최대한 아름다운 존재감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도록 나만 더 노력하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EP9. 사랑하려거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