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rpe diem Feb 16. 2021

06. 임신에 안정기란 없다

우리만의 연휴는 이번이 마지막이야


 “여보, 그거 알아?

  우리 둘이 보내는 연휴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 설 연휴의 첫날, 엄마가 어머님께 보낸 한우를 조금 나눠 받은 덕에 푸짐한 한 상을 차려 먹으며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임신 7개월, 5월 출산을 앞둔 우리에게 이번 설은 처음이자 마지막 연휴인 셈이다. 망각하고 있었다. 뱃속에 품고 있을 때가 좋을 때란 말을 실감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연애하기 시작한 작년 6월부터 지금까지 코로나에 꽁꽁 묶여 여행은 현실 불가한 것이 되어 버렸다. 신혼여행도, 태교 여행도 없이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니. 축복이가 태어나면 행복은 물론 배가 되겠지만, 우리 둘만의 자유는 당분간 우리 것이 아닌 게 될 테니까 소소하게라도 우리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멀리는 어려워도 1박 2일 강릉이라도 다녀오기로 했다.


오랜만에 맞은 바닷바람


 오랜만에 맞은 바닷바람은 상쾌했다. 서울보다 기온도 따뜻해서 오랜만에 두꺼운 외투를 벗고 마음껏 여기저기 활보하고 한 시간을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한 카페의 대기를 기다리면서도 지루한 줄 몰랐다. 워낙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방학엔 늘 외국이든 제주도든 떠나 있기 일쑤였던 내 컨디션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임신 중기에 접어들었으니, 가장 활동하기 좋은 시기에 누리는 자유도 나쁘지 않았다. 바다와 호수가 훤히 보이는 호텔의 전경도 마음에 들어서 모든 게 순조롭고 마냥 들뜬 채로 강릉에서의 첫 밤이 저물었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 시간도 11시라 여유가 있어서 9시까지 호텔 침대에 누워 여유를 만끽했다. 10시쯤 일어나 미리 검색해 둔 장칼국수를 먹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하고 샤워를 마칠 무렵, 일은 터지고 말았다. 선홍빛 피가 다리를 타고 흘렀고 샤워부스 바닥에 흥건해졌다. 말로만 듣던 하혈이었다. 임신 초기도 아니고 중기에 하혈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설 연휴 전날 병원에서 아이 상태도 매우 양호하고 자궁경부 길이도 적절해서 조산기도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갑자기 하혈이라니.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신랑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피가 멈춘 걸 확인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신랑을 불렀다.

 “여보, 밑에서 피가 나. 지금 피가 나면 안 되는 건데.”

 하혈이라곤 상상도 못한 신랑은 입에서 피가 난다는 말로 듣고도 놀라서 뛰쳐나왔다. 펑펑 울며 피를 흘리고 있는 나를 진정시키고 침대에 눕힌 뒤 정신없이 우는 내 배에 귀를 기울였다. 축복이 태동이 평소와 다를 바 없으니 별일 아닐 거라며 나를 안심시키고, 호텔 로비에 전화해 응급실 위치를 확인한 후 체크아웃을 준비해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임신 중기 하혈’을 검색창에 입력하고 같은 경우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대부분 경부 길이가 짧거나 전치태반으로 조산 위험이 있는 경우 혹은 갑자기 임신 후기에 태반 조기 박리가 온 경우였고 불과 며칠 전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은 나와는 경우가 다른 이야기들 뿐이었다. 불안을 잠재우려고 시작한 검색이 내 불안을 더 키우는 꼴이 되어갈 무렵, 응급실에 도착했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상주해 있는 큰 병원의 응급실이라 바로 산부인과로 이동해 태동 검사를 시작했다. 20여 분의 태동 검사 후 질 초음파로 고여있는 혈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배 초음파로 아이의 상태와 자궁경부 길이를 확인했다. 3일 전 초음파와 마찬가지로 몸무게는 770g 정도, 경부 길이도 5cm 가까이 될 만큼 안정적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고여있던 눈물이 마저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궁경부에 상처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역아네요. 알고 계셨죠?”

 어쩐지 태동이 골반 주위로 지나치게 활발하더니 역아였구나. 역아면 어떠하랴. 아이는 무사하고, 아직 출산까지는 석 달의 시간이 남아있다. 충분히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시간이 있고, 만약 여의치 않다면 제왕절개로 낳으면 되지. 작은 것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도 나도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신랑도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됐을 경우, 내가 느낄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파서 진료실에 들어가 있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며 자기가 더 잘할 테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신랑이 있고 아이는 무사하니 그거면 됐다.


잠깐 평화로웠던 강릉의 둘째 날 아침


 임신 중에 안정기란 없다. 남은 기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딱 하나다. 내 걱정과는 달리 늘 건강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주는 아이를 믿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아이는 생각보다 강하고 내 염려는 생각 이상으로 무력하니까.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휴는 요란했으나 의미는 충분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05. 임신 중에도 다이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