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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Feb 19. 2021

07. 언니는 꼭 영어유치원 보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나와 한 살 터울인 여동생이 하나 있다. 세상 가장 친한 내 친구이자 멘토인 내 동생은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결혼한 지 12년 차가 된 인생 선배이기도 하다. 한참 결혼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스물아홉, 동생 결혼 소식을 접한 뒤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와 격하게 다투고 결국 결혼이 아니니 헤어지자 결론을 내린 후 이별 후유증에 허덕일 무렵, 동생의 임신 소식에 야속했으나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했다. 결혼도 임신도 결국 동생이 주도했으니, 홀가분한 패자가 되어 백기를 마음껏 흔들며 서른을 맞았다. 그렇게 동생은 결혼하자마자 허니문 베이비로 첫 조카를 낳고, 14개월 터울로 둘째 조카를 낳았다. 그 조카들이 어느덧 초등학교 4학년, 5학년이 되었고 평소 고민이라곤 없던 내 동생은 최대의 난제에 부딪혔다.

 “언니, 축복이는 꼭 영어유치원 보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첫 조카가 어학원 레벨테스트를 보기로 한 날 저녁, 참담한 결과(사실 그렇게 참담하지도 않다)에 낙심한 동생이 내게 꺼낸 말이었다. 두 조카의 모든 교육은 내 동생 몫이었다. 혼자 줄곧 책도 잘 읽고 글까지 제법 잘 쓰는 내 조카는 어려서부터 글 쓰고 책 읽기 좋아했던 나를 쏙 빼닮아 난 늘 내 조카가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하루 한 권 이상, 일주일에 일곱 권의 책을 도서관에 가서 직접 고르고 집중해서 읽는 조카를 바라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최근엔 원어민과 화상으로 대화하는 걸 엿들었는데, 어려운 문장이나 단어는 아니더라도 영어로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구사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렇게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동생은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작년 나와 단둘이 스페인에 간 조카는 저 영어를 띄엄띄엄 잘도 읽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사람들 말에 휘둘리는 걸 싫어해서, 초등학교 엄마들 모임조차 거리를 두던 동생은 첫 조카 유치원 친구 엄마들 몇몇과만 적을 두고 친하게 지냈다. 끊임없이 비교하며 영어유치원이네 사립초등학교네 너무 일찍부터 경쟁을 부추기는 엄마들의 모임은 의도적으로 멀리한 동생이었다. 혼자서 꿋꿋하게 아이들 도서관 데리고 다니며 독서 교육도 하고, 영어에 수학까지 적절한 시기에 너무 뒤처지지 않도록 계획하고 공부시키는 내 동생의 얼굴엔 웃는 낯이 많이 줄었지만 힘든 코로나 시국에도 홀로 두 아이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 기특했다. 내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쉬운 게 아닌데, 적절한 훈육과 칭찬으로 아이들이 엄마와 감정적으로 틀어지지 않도록 원만히 조절하며 한 해 한 해를 보내는 모습에 내 동생이지만 참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출산을 앞둔 내게 갑자기 꺼낸 말이 영어유치원이라니.

 “갑자기 무슨 영어유치원이야?”
 “애 하나였으면 나도 영어유치원 보냈을 거야. 사립초등학교도 보내고.”

 ‘무사히 건강하게만 나와다오.’ 하루에도 골백번 외치는 내게 영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10년 이상 국어를 가르친 난, 아직도 영어유치원이나 사립초등학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고 한국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해서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신랑도 나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아 다행이다 여기며 동생의 선례를 어느 정도 답습하려 했는데, 내 동생은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모양이다.

 “한 달에 기본 백만 원씩 나가는 영어유치원을 무슨 수로.”
 “애 하나잖아. 나중에 들어갈 사교육비 생각하면 비싼 거 아니더라.”

 어려서부터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하고 싶어 하던 내 동생은 영어 교육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서 하는 말인지 몰라도, 영어보단 국어교육이 우선이라 여기는 내 생각은 달랐다.


자기 생각을 적절한 우리말로 잘 표현하고 책 읽는 걸 사랑하는 우리 조카의 영특함이 변질되지 않은 채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훌륭한 것이며, 그런 기질을 만들어 준 내 동생은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데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기본기랑 흥미가 중요한데, 서현이(첫 조카)는 원어민이랑 대화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뭐든 주체적으로 하는 애잖아. 고학년이 돼서 처음 본 시험이고 문제 푸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일 뿐이야. 너답지 않게 뭐 그런 거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그래.”


 “그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언니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아무튼 그래.”

 그래도 그런 게 아니라며, 펄쩍 뛰는 내 동생의 푸념은 결국 늘 그렇듯 하루도 안 돼 수그러들었으나 과거로 돌아간다면 영어유치원을 보내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내가 아직 뭘 몰라 쉽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지않은 미래에 동생보다 더한 후회와 좌절감으로 아이 앞에 절절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출산을 앞둔 내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욕심 많고 지기 싫어하는 내 모습을 아이에게 투영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하나뿐이다. 더불어, 공부보다 인성을 갖춘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맞이할 것이다. 본인이 먹은 건 스스로 그 자리를 깨끗하게 치울 줄 알고, 자신의 잘못은 사과하고 상대의 호의에는 고마움을 표할 줄 알며, 주변을 둘러볼 줄 알고, 어른을 보면 인사할 줄 아는 밝은 우리 조카들처럼만 우리 축복이가 자라주길 바라는 그 마음으로 나는 엄마로서의 동생을 존경하고 아낌없이 응원한다.


내 동생이 본보기가 되어주어서
난 오늘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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