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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pe diem Feb 24. 2021

08. 어쩔 수 없이 경력단절

 2020년 내 나이 마흔에 학교를 옮겼다. 연초에는 분명 남자 친구도 남편도 아이도 없었으니, 이 학교에서 오래오래 내가 하고 싶은 일 실컷 하면서 최선을 다해야지 다짐하며 시작한 새 출발이었다. 코로나로 아이들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지만,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면서 언택트 시대에 맞게 수업을 구성하고 소통하려 노력했고, 간혹 만나는 아이들과의 시간엔 그 나름대로 자주 웃고 간혹 찡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았고, 업무도 어렵지 않았다. 늘 그렇듯 내 일에 있어서 올해도 난 운이 좋은 편이었다.


교정에서 찍은 2020년의 첫 벗꽃


 2020년 여름,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될 줄 모르고 시작한 관계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마냥 거침이 없었다. 4월에 처음 만나 6월에 연애를 시작하고 10월에 아이가 찾아와 12월에 결혼했다(요약해서 나열하고 보니 참...). 11월 수능 감독은 도무지 무리였고,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생기자마자 임신과 결혼 소식을 조용히 교감선생님께 전해야 했다. 두 손 꼭 잡으며 누구보다 기뻐해 주시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내 개인사가 학교에 괜히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컸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이렇게 좋은 분과의 인연이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게 2021년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어쩔 수 없는’ 경력 단절을 확정 지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결혼도 아이도 나에겐 없다고 여기며 맞이한 마흔에 기적처럼 찾아온 남편과 아이는 아무리 되새겨봐도 신기할 노릇이고 행복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내 경력 단절의 어쩔 수 없음과는 별개의 문제다. 행복하긴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될지 기약할 수 없는 경력 단절은 솔직히 두렵고 막막하기만 하다. 새 학기를 준비하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업무분장표에 내 이름이 없고, 나에겐 소속이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기쁜 일이라 자발적으로 잠시 안녕이지만 마음이 헛헛한 건 어쩔 수 없었다.


12월, 아이들이 전한 칭찬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헤어지려니 아쉽네.”
“올해도 같이 근무하면 좋았을 텐데. 아이 잘 키우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이니 아이 잘 키우고 다시 봅시다.”
“선생님처럼 좋은 사람을 붙잡을 수 없는 게 아쉽다 진짜. 다음에 다시 꼭. 알죠?”

 작별 인사를 건네는 선생님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아쉬움과 다음을 기약하는 따스함이 묻어나 내가 보낸 지난 1년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에 행복했으나, 그 많은 인사들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로 일관되어 있었다.

“그러게요. 저도 너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뭐.”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어찌할 도리 혹은 방법이 없다’는 의미로 지금의 내 처지와 딱 맞는 말이라 이 말 외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5월에 출산이라 3,4월은 만삭이니 몸이 무거울 테고, 출산 후 100일은 아이와 나를 위해 온전히 필요한 시간일 테고, 아이가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할 정도는 돼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그게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말로만 듣던 경단녀가 내가 된다고 생각하니 아직 실감이 나질 않고, 모든 엄마의 경력단절은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얼떨떨하기만 하다. 이런 나의 심란한 마음을 엄마에게 이야기하니 엄마는 역시 내 편에서 호의적이다. 평일에 엄마에게 맡기고 주말에만 데려가라고 선뜻 말해주는 엄마에게, 고맙지만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못할 노릇이란 생각에 그것도 정답은 아닌 것 같아 마음만 고맙게 받고 거절한 채 기약 없는 경력 단절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중이다.

 어떻게 흘러갈지 종잡을 수 없었던 2020년만큼 나의 2021년, 2022년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으나 십 년이 넘도록 내 일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고 삶의 의미와 수많은 가치들을 발견한 만큼 또 다른 행복과 가치와 의미들이 존재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도 도리나 방법은 분명 있다.


교사로서의 경력은 당분간 안녕(bye)이지만
엄마로서의 경력은 새로운 안녕(hello)이니
기꺼이 설레며 맞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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